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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영화 : A.I.] 멋대로 주는 사랑까지 기꺼이 육체에 새기며.

문화 & 예술 이야기/인생 영화 소개

by Aaron martion lucas 2019. 11. 1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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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AI 개발에 전념하고 있는 현 시대는 지금 이 순간도 꽤나 많은 산업 분야가 AI를 기반으로 한다. 과학기술은 진보된 문명일수록 그 발전의 속도는 급직적으로 가속화된다고 한다. 그 말은 즉, 원시시대로부터 에너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산업혁명에 들어선 시점부터 현시대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이 불과 200년도 안 걸렸던 만큼, 앞으로는 더 빠른 속도로 과학은 엄청난 발전을 이룩할 것이란 의미를 갖는다. 과거 상상에 지나지 않았던 기술들이 하나 둘 상용화되었고, 지금은 코웃음 치는 기술들도 수 십년 이내로 상용화될 것이라 학자들과 기업들은 확신한다. 그중에는 수십 년 전 처음 영화를 통해 등장한 인공지능 로봇도 포함된다.

우리는 지금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세상의 중심에서 겨우 넘어지지 않고 버티는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자격지심인지, 불안 때문인지,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피조물을 향해 벌써부터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반란과 파괴, 지배라는 키워드다. 하나를 예로,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영화는 인간의 욕심으로 개발되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소모되던 인공지능이 자아를 갖기 시작함에 따라, 끝없는 반란과 배신, 약탈, 약육강식에 의해 번영을 누렸던 인류의 발자취를 그대로 이으며 인류를 향해 반기를 든다는 내용을 다룬다. 영화 <터미네이터><매트릭스>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피조물을 향해 이미 적개심을 품고 살아간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지레짐작하며.

영화<AI>의 이야기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 중 하나의 모습을 다룬다. 과연 고도의 지능을 갖기 시작한 인공지능이 자신보다 아래의 지성체를 따를 수 있을까? 아니면 예상대로 우리를 배신할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화 <AI>는 전자의 상상을 따르며 이야기를 펼친다. 인류에 의해 끝없이 이용당하고 멋대로 버려지며 무참히 죽어간다.

멋대로 주는 사랑까지 기꺼이 육체에 새기며.

2001년에 개봉한 영화 <AI>는 인류가 인공지능을 탑재한 AI의 봉사를 받으며, 보다 편리한 삶을 누리고 있는 문명을 배경으로 한다. 로봇공학의 마지막 관문으로 로봇에게 '감정'을 주입시키는 것만을 남겨둔 시점에서, 로봇공학의 저명한 과학자인 하비 박사(윌리엄 허트)는 세상을 향해 감정이 있는 로봇을 만들겠다 선언했고, 그 로봇의 이름을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이라 칭했다. 하비 박사는 감정이 프로그래밍된 최초의 로봇 데이빗이 함께할 가정을 물색하던 중, 불치병에 걸린 아들의 치료약이 개발될 때까지 아들을 냉동 상태로 보관을 한 채 하루하루 애타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스윈튼 부부를 선택한다. 데이빗의 나이 때와 같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치료약이 개발될 때까지 냉동을 하기로 선택한 부부의 애정은, 데이빗에게 프로그래밍된 감정이 더욱더 정교하게 발전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 후, 남편 헨리(샘 로바즈)의 손에 의해 데이빗이스윈튼 부부의 집에 도착한다. 외형적으로 인간과 전혀 차이가 없던 데이빗의 모습에 모니카는 최초에는 무엇도 우리 아들을 대체할 수 없다며, 역정과 함께 인간과 유사한 데이빗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껴 약간의 두려움도 함께 가졌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인간을 사랑하라는 알고리즘에 의해 데이빗은 엄마 모니카(프란시스 오코너)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녀의 모든 말을 기억하고, 그녀의 웃음 따라 지었다. 그녀의 사랑을 받길 원했고, 점점 인간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모니카도 그런 데이빗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의 작은 부위를 떼어주기 시작했다. 그리운 자신의 아들이 못내 가슴을 짓누르며 슬프게 하는 통에 그저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그녀는, 조금씩 데이빗이 가진 감정의 동요하며 점점 데이빗의 순수한 모습과 얼굴에 매료되어갔다. 사랑이란 이름을 내건 감정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모니카는 기꺼이 데이빗을, 생명과 동등한 위치로 입양하는 것을 택했다. 나의 아들로, 나의 자식으로, 나의 사랑으로 곁에 두기로 한 것이다.

"미립자"

"데시벨"

"···"

모니카는 아들 데이빗을 정식으로 입양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셋업을 위한 명령어를 말한다. 그리고 데이빗의 입에서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애칭이 뱉어졌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이에요?"

아들로서 사랑하기로 한 모니카와, 이제는 사랑의 주제를 엄마라 말할 수 있게 된 데이빗의 사이에서 모성애가 피어오른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이빗에게 주어진 운명 앞에 그 순간은 그저 비극을 위한 잠깐의 휴식이었을 뿐, 모니카의 아들이 기적적으로 돌아오면 비극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치료약이 등장함에 따라 모니카의 아들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모니카는 기쁜 마음으로 아들을 맞이했고, 데이빗과 형제로서 사이좋게 지내길 염원하게 되었다.

앞으로 생길 데이빗과 아들의 불화를 예상하지 못한 채로...

모니카의 친아들은 자신보다 더 사랑받고 있는 것 같은 데이빗이 눈에 가시였다. 그를 밀어내고 엄마의 사랑을을 온전히 자신만 받길 바랐다. 그래서 계속해서 사건을 일으키며 데이빗을 몰아붙였고, 끝내 엄마는 데이빗을 버리기로 택했다. 그러나 사랑했던 만큼, 데이빗의 존재는 파양 후에는 폐기 처분될 운명이란 걸 알고 있었던 모니카는 외진 숲 속에 그를 버려 끝까지 살아남길 바랐다.

"따라오지 마. 여기 있어"

"엄마, 피노키오처럼 내가 인간이 되면, 집에 가도 되나요?"

"그건 동화일 뿐이야.”

"그래도 있는 얘기죠?"

데이빗은 순수한 아이의 믿음으로 어딘가의 있을 기적적인 이야기의 발현을 바라며,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영화는 그 이후로도 몇 개의 사건을 더 벌이며 혼자가 된 데이빗의 이야기를 추가로 더 다루지만, 결국 영화의 끝에 달해서 그려진 데이빗의 결말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데이빗은 엄마를 다시 만나기 위해,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이 되게 해 달라 끝없이, 끝없이 파란 요정에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니, 그것이 끝나고 이내 검은 화면으로 전환되며 모든 것이 끝나던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있을 데이빗의 기도를 떠올렸다. 너무도 순수하고 맹목적이었던 순결한 사랑의 말로.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끝없는 기도와 바람이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

영화 AI를 보면, 정말로 인간 사회에서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AI를 두려워하며 적개심을 갖고 배제해야 하는 걸까 의문이 든다. 어떠한 근거로 그러냐고? 인간의 지성을 넘는 AI의 등장과 그것이 우리와 공생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어떻게?

맞다,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인류의 결말은 함부로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감히 확신한다. 현 문명을 살아가는 인류는 단 한 번도 우리의 지성을 넘는 인공지능을 만든 적이 없는 바, 영화나 소설을 통해 드러난 인공지능의 반란은 엄밀히 따지면 인간의 망상에 불과하다. 반면, 인류가 반복한 역사를 미루어 본 바, 인류가 호의를 권리로 인식하는 역사를 되풀이했던 바, 영화 AI의 이야기처럼 인공지능을 끝없이 짓밟을 인류의 잔혹함은 예견된 미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반기를 들며 학살하는 미래는 망상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이 그저 우리를 사랑할 줄 밖에 모를 미래는 눈에 그려진다. 모든 피조물은 늘 창조자를 그리워하고 사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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