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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과거사 정리 :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인가 혹은 이미지 세탁일 뿐인가?

국제 & 사회 이야기/국제 사회 문제

by Aaron martion lucas 2020. 9. 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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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을 전후하여 그리스에 재정 위기가 닥쳤을 때, 그리스의 긴축재정 및 공공부문 감축을 요구하는 '트로이카(유럽중앙은행, 유럽연합, IMF)'와 이에 반대하는 그리스 정부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장기간 이어졌던 것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중, 그리스가 뜻밖의 카드를 꺼냈다. 바로 현재 유럽연합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는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 침탈에 대한 배상 요구였다.

그리스 점령 후 아크로폴리스 신전 앞에 나치기를 게양중인 독일군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스는 나치 독일의 침략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이다. 당시 나치 독일의 그리스 점령의 결과로 산업기반의 80퍼센트 이상, 천연자원 및 산림의 25퍼센트 정도가 파괴되었으며, 인구 중 10퍼센트 가량이 사망했다. 또한 나치 독일은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4 7,600만 라이히 마르크(당시 독일의 통화, 현재 가치 약 103억 유로에 해당함, 즉 한화 14조 5천억 원)를 그리스 중앙은행으로부터 강제로 무이자 대출해갔다. 덧붙여 각종 물자를 공출해갔으며, 그리스 민족해방 운동을 전개하던 빨치산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제재를 그리스인들에게 부과했다. 그 결과 추축국의 점령으로 막대한 손상을 입은 그리스의 경제는 더욱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고, 경제 및 식량난으로 그리스인 수십만명이 아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 근현대사에서 그리스가 채권국이 되었던 시대는 이때가 유일하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현재 독일의 과거사 반성의 모습을 보고 들으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독일의 과거사 문제는 상대적으로 잘 청산되지 않았는가? 패전 후 맺은 포츠담 회담을 통해 그리스를 비롯하여 나치 독일의 점령으로 피해를 입은 유럽 및 구소련 지역이 막대한 재정적 보상을 받지 않았는가?

2010년을 전후하여 벌어진 금융위기의 맥락에서 그리스가 독일의 전후 보상 문제를 카드로 꺼낸 것이 정치적으로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이 문제를 심도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과거사 문제를 청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유/무상 지원금 및 차관 명목으로 8억 달러를 받아낸 것으로 일본의 과거 제국주의 침탈과 우리 안의 식민지 잔재가 온전히 청산되었다고 보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배상금 문제는 아래 포스팅을 참조 바란다.)

한일청구권협정과 전후 일본의 배상금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면↓↓↓

 

[Weekly Issue] 일본의 경제 보복 feat.한일청구권협정이란?

[Weekly Issue : 19.06.30 ~ 19.07.06] 안녕하세요 한주동안 핫했던 금주의 Issue를 다뤄보는 시간 Weekly Issue입니다. 이번주는 지난 1일 아베신조 총리의 대한민국 경제제재와 관련된 내용을 담아 보도록 하�

apiece-korea.tistory.com

이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더불어 추축국 블록에 속했던 독일의 전후 과거사 정리를 살펴보자.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독일이 과거의 역사적 과오를 제대로 반성하고 청산한 모범 국가라는 통념이 여전히 강하다. 게다가 세계경제 규모 2, 10~12위 가량의 국제적 영향력을 지닌 두 이웃국가들에 대해서조차 나 몰라라 뻗대는 자세를 취하는 이들이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 일본과 한참 대비되어 보인다. 이 이미지는 어디까지 진실일까?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추념비에서 무릎꿇은 장면은 독일의 과거사 반성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되 있다.

사과 받지 못한 자, 롬족(집시)들의 비애

물론 미디어의 발달로 역사가 보다 대중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은 현시점에서는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으로서 독일의 이미지가 조금은 옅어졌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식민지 침탈을 일삼았던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대해서는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외면해왔던 행태가 재조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주의 독일의 아프리카 침탈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유럽에서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 문제에 집중하자. 과연 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나치 독일의 침탈과 반인륜적 범죄가 현대에 제대로 청산되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과거 서방 열강이 즐비한 유럽 지역에서만큼은 과거사 청산이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치 독일의 극악무도한 전쟁 범죄의 대표적 사례로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 집단학살을 떠올린다. 물론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은 시대를 넘어 추모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치독일이 유대인들만을 집중 타겟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우월한 아리안 혈통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그룹으로 유대인을 위시하여 롬족(집시), 슬라브인, 공산주의자,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주요 타겟으로 삼았다. 이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롬족 중 무려 50퍼센트 가량이 나치 독일의 집시 말살정책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나치 독일 패전 이후 시행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과 포츠담 회담에서 롬족에 대한 배상은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후에도 롬족들은 유럽 사회에서 이등 시민으로서 차별과 배제를 면치 못했다. 전후 독일에서는 롬족 여성들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이 자행된 적도 있다. 이러한 조치는 독일 뿐 아니라 다른 몇몇 서방 국가들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자행되었다. 1982년에 들어서야 서독 정부는 자국에 의해 롬족들에 대한 반인륜적 전쟁범죄가 일어났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종전 이후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독일의 집시 말살정책 및 인종청소가 은폐되어왔던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집시 가족의 모습, 평온해 보이나 남편은 생체실험으로, 여자와 아이들은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처형 직전 사진을 찍은 집시의 모습, 의연한 노모와 두려움에 고개를 숙인 아이, 그러나 우린 유대인만 기억할 뿐 아무도 알지 못했다.

흔히 '집시'로 알려진 롬족은 12세기경 발칸 지역으로 이주한 북인도계 주민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유럽 전역을 유랑하며 대대로 수공예로 생계를 이어왔다. 롬족들은 텍스트 문화보다 구술문화가 발달했다. 덕분에 이들의 애환이 담긴 민요와 춤은 이후 유럽, 특히 발칸 지역 대중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롬족들이 현대 유럽의 문화예술에 많은 공헌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차별과 혐오, 오해의 대상이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집시 말살정책은 독일이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하기 시작하던 19세기말에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독일이 부국강병의 근대 국가로서 거듭나는 데 있어 걸림돌로 간주되었다. 롬족들은 당대 독일 사회에서 반사회적이고 게으르며, 불결한 존재로 비쳐졌다. 나치 독일이 부상하면서 본격적으로 롬족에 대한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 수많은 롬족들이 나치 독일이 유럽 곳곳에 세운 강제 수용소에 잡혀갔는데,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이들도 많았다. 한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때 안네 프랑크도 수용되었는데, 롬족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이름 : 야세노바츠와 우스타샤

롬족들에 대해 가장 잔혹하고도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된 곳은 롬족들의 실질적인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발칸 지역이었다. 구 유고슬라비아(현재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지역을 점령한 후 나치 독일은 일제가 중국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던 것처럼, 크로아타아의 극우 민병대인 '우스타샤'와 제휴하여 자신들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고 자국 군인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우스타샤는 나치 독일의 지원 하에 사바 강 근교 야세노바츠에 강제 수용소를 세워 집시, 유대인들과 더불어 세르비아인, 반파시스트 및 좌익 계열 크로아아티아인들 및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수용했다. 이 때 우스타샤의 잔혹함은 일부 독일군 장성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야세노비츠에서는 칼과 도끼 같은 흉기를 이용하여 수용자들을 직접 학살했다. 이 학살에 크로아티아의 로마 가톨릭 교회도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가톨릭 사제들과 보조를 맞추어 세르비아인들을 동방 정교회의 일파인 세르비아 정교회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시키거나 무참히 학살했다. 때문에 야세노바츠를 비롯하여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자행된 집시, 유대인, 세르비아인, 반파시스트 및 좌익 계열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스니아인들에 대한 학살은 무척이나 잔혹하고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치보다 잔악하기로 소문난 우스타샤(크로아티아 파시스트)가 세르비아인을 칼로 찌르고 있는 장면

문제는 나치 독일의 첨병인 우스타샤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형제애와 단결', 그리고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인 등을 포괄한 유고슬라비아인(남슬라브인)들의 화합을 기치로 건국된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붕괴를 전후하여 반공과 극우 민족주의를 기치로 한 '대 세르비아주의', '대 크로아티아 주의'가 기승을 부렸고 급기야 상호 간 인종청소와 학살로 이어졌다. 이 때도 독일은 크로아티아를 지원했다.

피로 얼룩진 유고슬라비아 전쟁 종전 이후 우스타샤의 잔혹 행위들은 크로아티아의 몇몇 수정주의적 역사가들, 정치인들, 성직자들에 의해 '반공 애국', '세르비아의 패권에 맞선 민족적 투쟁'으로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에서의 학살 수는 과장되었거나 심지어 학살이 없었다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이 서적 시장, 미디어를 통해 버젓이 선전되고 있다. 일부 극우파들은 대놓고 우스타샤의 구호를 외치며 우스타샤의 전쟁범죄자들을 기념하는 집회를 열기도 한다. 감이 잘 안 잡히는 분들을 위해 풀이하자면, 마치 서울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욱일기를 들고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거나, 과거 일제가 만주국의 수도로 삼았던 장춘 시내 한복판에서 만주국 국기를 흔들며 만주국 국가를 제창하는 광경을 상상하면 된다.

우스타샤가 마치 크로아티아 독립군마냥 생각하고 있는 젊은 세대(좌)와 우스타샤 깃발을 들고 행진중인 극우 크로아티아인들(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역사 수정주의가 주류 사회로 퍼짐에 따라 크로아티아를 비롯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참상을 겪은 나라들 사이의 화해 노력도 지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많은 크로아티아 시민들은 파시즘과 극우 민족주의가 자국민들과 이웃나라들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무슬림 주민들과 연대하여 반파시즘 시위를 대규모로 열기도 한다.

독일과 일본의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기대하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패전국인 일본과 서독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진영'에 포섭되었고, 지리정치적 중요성에 따라 서방 세계, 특히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원을 발판으로 세계 제2, 3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독일은 통일 후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현재 유로존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아마 제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에 부과된 막대한 채무로 독일 사회가 나치즘으로 극단화된 사례를 서방 세계의 주요 정치인들이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구소련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구 공산권에 대한 견제 의도가 컸다. 이렇게 일본과 독일은 암울했던 전체주의, 군국주의의 이미지를 벗고 보다 '세련된' 문화 상품들을 창출해내는 선진국가로 완벽하게 이미지 세탁을 해냈다. 특히나 독일은 역사적 과오를 철저히 반성한 모범국가의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그 반성은 독일 정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서방과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을 뿐 유럽 내에서 주변부에 속한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 지역과 롬족들에 대한 반성은 아니었다. 유럽과 멀리 떨어져있는 많은 한국인들은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는 알지만 야세노바츠와 우스타샤는 모른다. 이 역시 일종의 이미지 세탁의 결과는 아닐까. 현재 구글 및 어떤 검색 포털과 매체에서도 독일의 홀로코스트 자료 중 장애인이나 집시족 및 여타 민족에 대한 내용은 함구하고 찾아볼 수 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며 반성인 것인가?

일본과 독일이 과거에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뿌려놓은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망령들은 여전히 국제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우리도 그 망령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 사회에 주입된 전체주의 문화가 군사정권 시대를 거치며 심화되지 않았는가. 그 망령들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언제 평화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요인으로 변모할지 모른다.

 

<루카스 매거진 - 아름답고 자유로운 작가가 있는 곳>
작가 : 요르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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