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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청소로 태어난 공화국 이스라엘, 그들이 남긴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국제 & 사회 이야기/국제 사회 문제

by Aaron martion lucas 2019. 10. 19.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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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스라엘이 무죄가 아니며 구원도 아니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것이다. 이스라엘의 탄생과 확장으로 우리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우리 자신이 겪었던 디아스포라의 비극을 다른 민족에게 겪게 했다.

- 유대교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 다비드  구리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샬롬과 쌀람, 장벽에 가로막힌 평화, 유재현, 창비, 2008, p.114에서 발췌)

마르틴 부버는 20세기 유대교가 낳은 가장 위대한 종교철학자이자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명이다.  편지를  때도  노(老) 철학자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사이의 평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평화 공존이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심지어 그는 근동 지방의 평화를 위해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는  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염원은 평화를 기원하는 소박한 신앙심에서 기인했다.

가자지구

하지만 정작 현실은 가혹했고 부버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에 건국된  70년이 지난  시점에도 팔레스타인은 고통받고 있다. 이미 유엔과 국제사법재판소는 1967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서안지구(동예루살렘 포함) 가자지구의 강제 점유를 불법으로 간주해 왔고, 건국과 전쟁 과정에서의 인종청소로 인해 난민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권 보장을 여러차례 권고한  있다.  국제법에 따라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갖가지 방식으로 이곳의 점령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봉쇄된 가자지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감옥으로 불린다. 이처 이스라엘은 국제법을 무시한  해상, 공중, 지상으로 가지지구를 봉쇄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의 봉쇄로 식료품,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필요한 자재도 반입이 제한된다. 심지어 장난감이나 신발과 같은 생필품까지 통제되고 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 사업기구(UNRWA) 따르면, 가자지구의 물의 95퍼센트는 식수로 활용할  없을만큼 질이 나쁘며, 노동인구의 절반 가량이 실업 상태이다. 그리고 인구의 80퍼센트 가량이 구호물자를 통해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가자지구로부터 일말의 구실거리가 생기면 이를 빌미삼아 이스라엘로부터 무차별 폭격이 가해진다.

서안지구

가자지구로부터 떨어진,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의 통치 하에 있는 서안지구의 상황도 가자지구보다 결코 낫다고   없다. 현재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경고에도(심지어 미국도 여기에는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서안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Israeli settlement) 건설하고 있다. 말이 정착촌이지 사실상 점령촌이다. 해당 영토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내쫓고 이스라엘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정착촌을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자치기구는 이른바 '평화협상(Peace Process)' 공언한 1993년의 오슬로 협정 이후 이스라엘의 암묵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점차 기득권화되어갔다. 팔레스타인 자치기구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활동가들을 체포, 구금하기도 한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의 관료들  상당수가 부패 스캔에 휘말리기도 했다.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식민화 정책과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의 한계 속에서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부버의 경고처럼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은  이상 구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 주민들만큼은 아니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대치하고 이들을 통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킨다. 많은 이스라엘 병사들이 점령지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는다. 점령지에서의 행위로 인해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상부로부터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게다가 하마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의 무기의 질은 이스라엘 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눈에 띄게 성능이 좋아졌다. '불패와 투지' 이스라엘 군대의 신화도 깨지고 있다. 2006년에 이스라엘이 일으킨 2 레바논 전쟁도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첨단 무기를 지니고도 레바논 헤즈볼라를 이겨내지 못했고, 레바논 지역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시키지도 못했다. 오히려 무차별 폭격과 인명 살상으로 국제사회로부터의 비난만 증가했을 뿐이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향한 이스라엘 무차별 폭격은 항시 대기중이다. 

이스라엘의 민낯이 드러난 현재, 서방 세계의 여론도 점차 이스라엘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이미 전세계 곳곳에서 많은 평화 운동 단체들이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 군사적 팽창 정책을 공식적으로 규탄해왔다. 물론 서방 국가들의 중동 정책의 기본 기조는 여전히 강경한 친이스라엘이지만(특히 미국) 이들 정부들도 과거와는 달라진 시민 사회의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무리한 군사, 외교 정책으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려  것이다. 이러한 비극은 1948년에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이 무력으로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내쫓고  땅을 차지했던 것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친시온주의 :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들의 민족적 원류로 삼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근대 유대 민족주의 이념 

무력에 의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에서 자신들에 대한 공포 분위기가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의 대외 정책이 그랬다. 그러나  대가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시민들 모두에게 가혹하다. 그리고 앞으로  치러야  대가들이 있다. 바로 /근동 전역에 퍼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겪어온 고통이 두드러진다.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들

이스라엘은 여러 국제기구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을 부정하고 있다.  결과 현재 /근동 전역으로 퍼진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 사업기구(UNRWA) 추산으로 500만명이 넘는다. (2015년 기준)  45만명 가량이 레바논에 거주하고 있다.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다른 지역의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비교해보더라도 훨씬  열악한 조건과 법적, 사회적 차별에 직면해왔다.

이스라엘에 쫓겨 레바논으로 온 팔레스타인들 그러나 어느곳도 그들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있다.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의료, 직업, 교육  기본적인 사회 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 이들은 거의 수십년 동안 의료, 기술, 법률  대표적인 공공부문의 직장에 진입할  없었다. 심지어 2001년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토지 소유 금지 법안도 발표되었다. 2005년이 되어서야 몇몇 공공부문의 직장에 대한 진입 장벽이 철폐되었지만  조치로 인해 이득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거의 없었다.  고용 시장에 진입하는 데도 많은 비용이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레바논의 사회보장정책의 혜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하경제 부문의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해  이들이 많은데 과연 이들이 중상류층 레바논인들과 제대로  경쟁을   있을까? 그런 이유로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가자지구와 마찬가지로 교육, 생계의 많은 부분을 UNRWA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불안한 지역 정세 속에서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취약한 위치에 있었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사브라 샤틸라 난민 캠프 학살은 전쟁 중에 이스라엘 군대와 극우 세력에게 이들이 얼마나 쉬운 타겟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해당 칼럼 보러가기↓↓↓>

 

피와 전쟁범죄로 얼룩진 레바논 내전, 그리고 레바논 헤즈볼라의 발흥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전쟁범죄 메나헴 베긴 수상은 엘리 게바 대령과 45분 동안 같이 있었고, 그 후 엘리 게바 대령은 지위를 박탈당했다. 엘리 게바 대령은 수상 말했던 것을 상기했다. “저는 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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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레바논에 팔레스타인 임시정부 형태로 자리를 잡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행보는 레바논인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이들은 종종 레바논의 사회 질서를 해치고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PLO, 그 중에서도 가장  정파인  파타(현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여당)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도 팔레스타인 독립 지도자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아라파트는 레바논과 시리아, 튀니지, 그리스 등으로 계속 지부를 옮겨 다녔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언제나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아라파트와 PLO 집요하게 추적했다. 나중에는 아라파트와  측근들이 부패하고 기득권화되었다는 비판이 팔레스타인인들과  팔레스타인 성향의 인사들에게서도 나왔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레바논 사회 내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곱지 못한 시선이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이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편으로 많은 레바논인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해서 공감의 정을 느낀다.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지원,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을 공언해온 헤즈볼라가 레바논의 가난한 시아파 무슬림 공동체  아니라 상당수 그리스도교도들, 일부 진보적인 청년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것은 레바논의 종파주의와 특수한 정치 구도에서도  원인이 있겠지만, 똑같이 강자에게 고향을 유린당한 자들로써, 자신들처럼 민중들을 온전히 대변해주지 못하는 정치 시스템 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서 동병상련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에도  원인을 찾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약자로서 연대의 정신을 헤즈볼라를 통해서 표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은 애증의 관계가 되었다.

결론, 경계를 넘어선 평화를 위해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은 웃었고 팔레스타인들은 자신들의 터전에서 떠나야 했다.

5 15일은 이스라엘에게는 독립기념일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나크바(재앙) '*이다.  나크바 사건으로 인해 7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학살당한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크바 사건은 팔레스타인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레바논에도 영향을 미쳤다. 건국 이후 이스라엘의 무력에 의존한 대외 정책은 레바논인들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겼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강대국들의 암묵적이거나 직접적인 후원도 이스라엘의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뒷받침해왔다.

나크바(재앙)  : 유엔 분할안에 따라 영국령이었던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나뉜 상태에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언했고, 다음날인 5월 15일 영국이 위임통치 종료를 선언했다. 졸지에 팔레스타인 주민 70여 만 명은 자신들의 터전을 잃고 오갈데 없는 난민이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나크바'보다도 '이스라엘 독립'  익숙하다. 우리도 가까운 과거에 '나크바' 유사한 역사를 겪었고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더욱 유대인/유대교도들이 겪어온 고난의 역사와 더불어 팔레스타인인들이 현재 겪고 있는 저항의 역사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덧씌워진 서구 중심적 프리즘을 벗어서 레바논/팔레스타인의 근현대사를 바라보자. 그들에게서 옛적 우리의 선조들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휴머니즘적 유산을 간직해온 유대 문화가 바로 보일 것이다.

혹자는 우리와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어떻게 일일이 신경   있겠느냐고, 우리와는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국제 정치의 역학은 국내 정치와 미묘한 상호성을 지닌다. 미국의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에 편향된 중동 정책은 지속적인 갈등과 분쟁을 초래했다. 게다가 이란  지역 패권과 서방 국가들간의 긴장으로 인한 대가는 일반 시민들이 치러야 한다.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을까! 우리가 억압받는 이들, 국제 정치의 불균등한 역학 관계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화살은 언젠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올지 모른다.

 

<루카스 매거진 - 아름답고 자유로운 작가가 있는 곳>
작가 : 요르고스
 
작가의 말 : 평화와 정의를 염원하면서 다섯 차례에 걸친 중동 칼럼을 마친다. 졸고에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앗! 살람 알라이쿰!(신의 평화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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