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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인들의 자그마한 투쟁은 결국 일본을 변화시킬 것이다.

국제 & 사회 이야기/국제 사회 문제

by Aaron martion lucas 2020. 1. 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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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언제나 하늘 높이 섬을 쌓고 있었다. 정중앙으로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했는지 모친은 알고 있었겠지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흘러내릴 때를 대비한 것'이라기에 그런 것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때는 정중앙의 숯가마가 가득 차서는 여관을 돌면서 팔고 왔을 때 납작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비로소 그게 사실은 강제 노동의 현장에서 탈출한 조선인을 숨겨 숯가마로 에워싸 도마코마이까지 마차로 운반해 도망치게 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조선인은 훈도시 달랑 한 장으로 도망쳐 나왔으니 낡은 옷이든 어떤 옷이든 일단 자신의 옷 아무거나 입혀서 도망치게 한 것 같았다…(생략)

- 아이누 민족 운동가 아시리레라 씨의 증언 -
옛날에는 이 주변에서도 아이누가 털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왜인에게 추궁당해 소학교에도 가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는 척하고 산으로 가서 하루를 보내고 온 적도 있었다. 자신이 체험한 것이기에 다른 사람은 역시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도 있었다. 그랬을 때 조선인이 “무엇이든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학교에 가세요.”라며 말했다. 집에는 조선 사람의 지인이 많이 있었다. 아이누 사람은 털이 많으니까 조선 사람이랑 결혼하면 제일 좋겠다며, 이런 험담도 샤모(일본인)로부터 자주 들었. 우리들은 “아이누 아이누”라며 나무에 올라가도 돌을 맞거나 샤모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우리들은 아이누임에는 틀림없지만, 순수한 아이누는 아니다. 러나 곤란에 빠진 조선 사람들이나 다른 힘든 사람들과 함께 숯을 굽거나 가마를 만들거나 했다. 거기서 일손이 부족하면 조선 사람들은 큰 참나무 밑 그루터기에서 먹고 자고 했었다. 그 참나무도 아직 여기에 남아 있다…(생략)

- 아시리레라 씨의 오빠 야마미치 쇼난 씨의 증언 - 
옛날, 젊은 부부가 개척을 하겠다며 찾아왔기에 열심히 잘해보자고 했다. 첫 겨울이 오고 머지않아 눈이 내리고 땅이 얼었다. 태어난 아이를 아이누 집 앞에 누더기 조각으로 싸서 두고 가버렸다. 아이누 집의 개가 많이 짖어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밖으로 나가 보니, 아기가 있었다. 이때, 아이누는 분명히 카무이()가 내려 주신 선물이라 말하며 받아들여 젖을 먹이고 아이누어로 키웠 다고 한다.

- 조선인과 아이누 민족의 역사적 유대, (p.72) -
아이누 민족의 집에서 숨어 지내면서 네무로 이와미자와 등 도내를 전전했다. (중략)산을 몇 개나 넘고 아이누 가족의 도움을 받아 히다카의 닛토 크롬 광산에서 일 하고 있는 동포의 숙소로 안내되었다. 아내도 있는 동포의 소개로 닛토 광산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어느 나이 많은 광부가 시마마키 망간 광산으로 가도록 추천해 가능한 멀리 도망치기 위해 가기로 했다.

- 1942년 조선 인천에서 홋카이도 히가시카와무라 애오로시의 발전소로 강제 징용된 정철인 씨의 증언 -

아이누 민족의 비극에서 나타난 근대 문명의 이면

미국의 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쓴 전세계적 베스트셀러 <, , >에서는 중남미의 아즈텍 문명이 스페인의 정복자(콩키스타도르)들에게 왜 그토록 허망하게 패망했는가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스페인 제국주의가 찬란했던 아즈텍 문명을 그토록 쉽게 무너뜨린 것에는 문자 문명의 힘이 컸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지역과 달리, 아즈텍 문명은 문자라는 개념 자체가 부재하다시피 했고 구술 문화에 많이 의존하던 판국이었다. 그런 아즈텍인들에게 문자를 통한 문화 침탈과 파괴는 총칼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아이누 민족 문화에 대한 침탈 역시 문자와 텍스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본은 총칼 뿐 아니라 문자 문명의 힘을 바탕으로 선주민으로서 아이누인들의 존재를 지워나갔던 것이다. 한 때 일본의 교과서에는 선주민족(先住民族)으로서 아이누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누인들을 동물처럼 바라보는 듯한 서술이 버젓이 실려 있기도 했다. 선주민으로서 아이누 민족의 지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현 시점에서도 일본 주류 사회에서 아이누인들의 존재는 여전히 낯선 타자로 남아있다. 현대 일본 사회에서 아이누 민족에 대한 차별은 주류 일본인들과의 교육 및 소득 격차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아이누 민족은 교육과 소득 수준에 있어서 주류 일본인들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

현재 일본 사회에 아이누족의 지위는 언제나 일본 본토인들보다 낮고 차별받고 있다.

아즈텍 문명을 위시한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아이누 민족에 대한 문화 침탈과 파괴는 근대 문명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인류는 문자로 상징되는 근대 문명을 토대로 더 많은 이기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젖혔지만, 동시에 제국주의, 파시즘, 전체주의, 전쟁, 생태계 파괴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이누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노예들은 근대적 폭력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다. 그 결과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측면에서 소외 계층으로 남아있다. 심지어 이제는 이들 집단 내에서도 또다른 차별과 배제가 존재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누, 저항과 연대의 주체로서

우리는 달리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그들의 근대에는 오로지 피해자로서의 역사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이누인들의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만을 강조하다 보면 우리는 자칫 이들을 제국주의의 수동적인 객체로 바라보는 신식민주의적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아이누 민족에게는 분명히 그 나름의 저항과 연대의 역사가 존재한다. 비록 조선과 중국, 류큐인들처럼 적극적인 정치적 투쟁의 형태를 띠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1985년부터 아이누족의 인권을 위해 활동해 온 오가와 류키치(가운데 남성)씨는 대표적인 아이누 민족운동가이다.

필자가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제국주의 시대 일본에서 아이누 민족과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 사이에는 똑같이 제국주의 치하에서 핍박받는 이들로서 연대 의식이 싹텄다. 위에 언급한 사례들은 그 중 일부일 뿐이다. 민족으로서 권리가 완전히 박탈되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던 제국주의 시대에도, 타향에서 소리없이, 이름없이 죽어간 조선인 노동자들의 시체들을 거두어 주고 그들을 위해 장사를 지냈다는 증언들도 여럿 전해진다.

결국엔 아이누인들의 자그마한 투쟁이 일본을 변화시킬 것이다.

2016 7 15일에, 홋카이도 대학에서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일본의 근대화 이후, 연구 목적으로 무단으로 도굴되어 실험실에 안치된 아이누인들의 유골 12구가 오랜 법정투쟁 끝에 반환된 것이다.

한국을 떠들썩하게한 훗카이도 대학 동학농민군 유골 발견도 이 과정에서 아이누족 유골과 섞여 발견되었다.

조선인 아버지와 아이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누 민족운동가 오가와 류키치 씨는 이날 모두 함께 돌아가자라고 말하며 유골이 든 나무상자를 두드렸다. 오가와 류키치 씨의 고백에는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소박한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일본의 근대 문명과 팽창주의의 논리가 약하디 약해 보이는 한 아이누 노인의 소박한 투쟁과 고백에 진 것이다.

일본이 연구 목적으로 도굴하여 동물실험실 등에 전시한 아이누인들의 유골은 수천 개에 달한다. 이 상당수의 유골들이 아이누인들에게 반환되지 못하고 있으며, 개중에는 신원불명인 유골들도 있다. 아이누 민족 활동가들은 오래 전부터 동포들의 유골들의 반환과, 일본의 반인권적 처사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줄기찬 투쟁을 지속해왔다.

1983년부터 지속된 투쟁은 아이누족에 대해 서서히 일본사회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근대 제국주의와 팽창주의 속에서 희생되고 외면받아온 아이누인들의 문화와 투쟁은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소멸의 위험에 다다른 지금에서야 일본 사회에서 조금씩 주목을 받고 있다. 제국주의, 전쟁, 생태계 파괴 등 근대가 불러온 문제에 대한 반성으로서, 소박한 자연친화적 문화와 조선인 등 약소민족과 연대해 온 그들의 역사가 이제서야 그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아이누 민족의 소박한 저항과 연대의 역사는 극우의 흐름이 발흥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앞으로도 이 작은 투쟁들이 모여 결국 일본 사회를 조금씩이나마 변화시켜나갈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카스 매거진 - 아름답고 자유로운 작가가 있는 곳>
작가 : 요르고스
작가의 말 : 탄압과 억압 속 아이누족의 아픔을 기억하며, 아이누족 관련 칼럼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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