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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 잊혀진 아이누 민족의 눈물

국제 & 사회 이야기/국제 사회 문제

by Aaron martion lucas 2019. 11. 1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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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빼앗긴 민족, 아이누

현재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에서는 아이누 민족의 인구를 25,000명 가량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실제 아이누 민족의 인구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 정설이다.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이어져 온 일본 정부의 아이누 민족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식민화, 차별, 문화 탄압, 강탈 정책과 일본 사회에 만연한 아이누 민족에 대한 차별과 멸시로 인해 본인들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거나 일본에 동화된 아이누 주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비공식 통계에서는 아이누 민족의 인구를 20만 이상까지 추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정확한 아이누 민족 인구를 알기는 힘들다.

현재 아이누족의 언어와 문화는 존폐의 위기 앞에 서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아이누어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Critically Endangered)' 언어로 분류하고 있다. 아이누어는 이미 노년층 아이누 민족 사이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 언어가 되어 버렸으며, 젊은 층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 체제가 마치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조선어 말살과 탄압 정책을 폈듯이, 아이누 문화를 말살하고 아이누 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일본어를 강요했으며 아이누어 사용을 금지했던 데에 그 원인이 있다. 현재 아이누어를 일상 생활에서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구는 불과 300명 가량이며, 아이누어를 모어로 하는 화자들은 공식 통계로 불과 15명이다. 다행히도 아이누 민족 운동가, 인권 운동가들(필자가 만난 할머니를 비롯한 아이누족들도 적극적인 민족 운동가들이었다)의 줄기찬 노력으로 아이누어가 보존되어오고는 있지만, 노래나 시, 종교 의식과 같은 문화예술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 및 공적 영역에서 아이누어가 되살아나기란 지금으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일본 내 민족적 소수자로서 차별과 배제를 받아온 집단으로 아이누족과 종종 비교가 되는 류큐인(오키나와 원주민)들과 대조해 보더라도 아이누 민족의 상황은 훨씬 열악하기 그지없다. 류큐어의 한 갈래인 오키나와어가 유네스코에서 '위험에 처한(Endangered)' 언어로 분류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언어 구사자가 수십만에 달한다. 류큐인들의 이해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정당도 있다. 비록 소수민족으로서 차별과 배제, 소외에 직면해 왔지만 류큐인들인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은 일본 사회 전반에 있어 결코 작다고 볼 수는 없다.

아이누 족은 그들의 민족성을 지키기위해 전통 춤과 노래를 보존하려 노력하고 있다.

반면에 아이누 민족은 일본의 오랜 세월에 걸친 인종청소를 방불케 하는 동화와 강탈의 결과로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무기는 노래와 이야기, , 미술, 자연과의 연대 의식이다. (주류 일본 문화와 류큐 문화와는 달리 아이누 민족 공동체에서는 문자 문화가 체계적으로 발달하지 못했고, 그 결과 구술과 오감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 예술과 전승 문화가 발달했다)

일본 - 아이누 갈등의 역사적 근원

일본인들과 아이누 민족의 갈등은 과거 막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는 아이누 민족이 선주민으로 살아온 땅이었다. 아이누 민족은 식생, 풍습, 문화, 언어, 외모에 있어서 일본의 주류 민족인 야마토인(재까지 일본에 정치적으로나 인구적, 언어적으로 다수파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혼슈 북부 너머까지 진출한 야마토인들은 아이누 민족과 아이누 민족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민족 집단들을 에조(蝦夷)라고 뭉뚱그려 칭했다. 조(夷)라는 한자는 한반도에서는 오랑캐와 같은 뜻으로 쓰였고, 중국에서는 이민족을 나타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야마토인들이 아이누 민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아이누 민족 공동체는 수렵 채집 및 어업을 바탕으로 일본인들과 물자 교류를 하기도 했지만 충돌도 적지 않았다.

아이누 최대, 최후의 항쟁을 이끈 족장 샤쿠샤인 기념 동상

무로마치 막부에서 에도 막부에 이르기까지 야마토인들의 지배에 대항하여 세 차례의 큰 민중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게다가 일본 본토에서 옮겨온 풍토병으로 인해 많은 아이누족들이 피해를 입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일본의 막부 체제는 아이누 민족에 대한 통치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에조치'(에도시대 아이누족을 몰아넣어 살게 한 거주지역)를 설치하고 아이누 민족의 거주지를 지정했다. 하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홋카이도 지역이 일본 내에서는 여전히 변방으로 간주되었기에 아이누 민족은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아이누 민족의 시련은 메이지 유신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메이지 유신 - 근대라는 가면에 숨겨진 야만성

 "아이누 사람들은 그때까지 먹을 만큼의 물고기만 잡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안 된다며, 먹을 만큼의 물고기를 잡는 것도 경찰이 와서 바로 체포해 갔다...(중략)

아와지에서 이주민이 많이 와서 아이누 사람들은 토지를 잃게 되었다. 이전에는 여섯 단의 논과 다섯 단의 밭이 있었는데 3분의 2 이상을 잃었다...(중략)

나보다 다섯 살 적은 여동생은 "오빠 절대로 아이누 같은 거 되지 마. 되지 마. 알았지?" 지금와서 생각하니 이젠 늦었지만 말이다(웃음). 7명의 형제 모두 그만큼 괴롭힘을 당했다...(생략)

-<조선인과 아이누 민족의 역사적 유대>, 청취 자료 중, 석순희 지음, 이상복 옮김, 어문학사, p.219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근대적 엘리트들은 천황이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을 근대적 민족 국가로 새로이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새로이 세운 일본의 민족성, 근대성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요인들은 그 뿌리부터 잘라야 했다. 수렵, 채집과 자연 친화적인 정령 숭배 사상을 생활의 기초로 삼으면서 주류 일본인들과는 다른 독자적 정체성과 문화를 지켜온 아이누 민족은 이들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엘리트들은 제국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홋카이도는 동아시아 쪽으로 영향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지리 정치적 발판으로 인식되었다. 그 곳에서 수천 년 넘게 원주민으로 살아온 아이누 민족의 존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한론'이 대두되어 조선에 대한 일본 침략 주의자들이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역사가 참으로 얄궂은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주요 피해 당사자들인 조선 민중과 아이누 민족의 운명이 거의 동시에 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12년 도쿄 우에노의 박람회에서 살아 있는 채로 전시된 아이누 가족, 이 박람회에 조선인도 끌려와 전시되었다.
1899년 쿠릴섬을 정벌하는 일본의 군함에 끌려와 군인들에 의해 억지로 춤을 추는 쿠릴섬의 아이누인

'근대화'를 명분으로 아이누 민족에 대한 야만적 조치가 시행되었다. 공적 영역에서든 사적 영역에서든 아이누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아이누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도 금지되었다. 이름도 강제적으로 개명당했다. '개척'이라는 명분 하에 본토의 일본인들이 홋카이도에 와서 아이누 주민들이 살던 땅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홋카이도 아이누 주민들의 생활 조건은 더욱 열악해졌고 게토화(특정 민족이 사회의 주류 민족과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되었다. 아이누 민족에 대한 이와 같은 수탈과 식민화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과 감독을 통해 자행되었고,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이어졌다.

아이누 민족의 눈물겨운 역사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그것과 닮아있다. 둘 다 '개척' '근대'라는 미명하에 갖가지 야만적 폭력을 감수한 것도 모자라 한 때 역사 속에서 그 존재를 부정당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와 저항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현대에 들어서야 그들의 역사와 전통이 각종 문화콘텐츠들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루카스 매거진 - 아름답고 자유로운 작가가 있는 곳>
작가 : 요르고스
작가의 말 : 다음 회에서는 이러한 야만적 상황 속에서 아이누 민족 공동체가 어떻게 조용히 연대와 정신을 실천했는지,그리고 현시점에서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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