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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이누족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조선인의 연대와 통혼

국제 & 사회 이야기/국제 사회 문제

by Aaron martion lucas 2019. 11. 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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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잊혀진 이웃, 아이누 [ Ainu, アイヌ ]

7년 전 일이다. 필자는 한 시민단체의 주관 하에 홋카이도를 일주일간 견학한 일이 있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아이누족 마을을 방문했다. 필자와 일행이 방문한 아이누족 마을은 홋카이도 최대 도시인 삿포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히다카 지청에 소재한 비라토리 쵸에 있었다.

아이누 전통 방식으로 지어진 주택의 모습, 자연과 함께 어울려진 모습이 인상깊다.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하면서도 도회적인 디자인이 반영된 주택들이 늘어선 지구를 가로질러 우리는 아이누족 마을에 도착했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누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산간 지역 한복판에 지어진 그 건물은 갈대로 덮여 있었고 한가운데에 창문이 나 있었다. 갈대로 지붕을 덮은 모양새는 흡사 우리나라의 과거 초가집을 연상시켰다. 그런 건물이 두어 개 정도 더 보였다. 확실히 필자에게 익숙한 일본 도시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어딘가 또 다른 외국에 와 있는 듯하면서도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도 더 토착적이라는 느낌. 마을은 어딘가 투박해 보이면서도 산과 나무 풀과 바람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경관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듯했다. 게다가 날도 저물어 해질녘 무렵이었다. 선선한 공기 중에서 가을 하늘의 노을이 산 아래로 스며들어 마을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다소 빡빡한 일정으로 지쳐 있었던 필자는 다시 생기가 돌았고 호기심을 느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전통 복장을 입은 아이누족의 후예

필자와 일행은 아이누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머리에 베일을 감아 쓰고 수염을 멋지게 기른 한 청년이 우리를 맞았다. 안에는 넓다란 공간이 있었다. 아마도 손님 대접과 가이드를 위한 공간인 듯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사각형으로 파인 공간이 있었고 장작에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곧 아이누 전통 의상을 입은 할머니 한 분이 왔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꽤 오랫동안 마을을 들르는 일본인, 여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아이누족 문화와 역사와 가이드 역할을 해 온 것 같았다. 우리는 고요하게 타오르는 불을 한가운데 두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들었다.

자연과의 상부상조 속에서 연대의 정신을 찾다

아이누족의 신화와 종교는 자연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비록 제도화된 형태는 아니지만 아이누족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부터 특유의 자연 친화적인 정령숭배 신앙을 유지해왔다. 그들은 동식물뿐 아니라 불, 바람, 물과 같은 자연 무생물에도 혼이 깃들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식량을 위해 동물을 잡을 때도, 오랫 동안 쓰던 물품을 처분할 때도 이 정령숭배 사상에 입각해서 의식을 치르듯이 한다. 집 안에 아궁이를 파고 불을 피우는 것도 그러한 의식의 일환이다. 불을 지피고 지켜보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성을 되새긴다.

유명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 월령공주>가 정령숭배 사상에 기초한 아이누족의 신화에서 모티브를 받았다

할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근방의 산속에서 죽은 인간들의 원혼들이 떠돌곤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옛적에 본토인(즉 일본인)들이 이 땅을 개척하고 차지하면서 섬의 원주민인 아이누인들과 충돌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는데 그때 죽은 이들의 원혼들이 산 주변을 배회하더란 이야기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이야기에 필자는 살짝 피식했다. 저런 이야기를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하기엔 알맞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아픈 역사의 일환으로서 설명하시는 것이니까 은유적으로라도 받아들여야지. 필자는 내색하지 않고 주의 깊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홋카이도에 있는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갖은 착취를 당했고 결국 그중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최대한 절제된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했다.

할머니의 남편 분은 강제 징용되어 끌려가던 와중에 탈출한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탈출 와중에 우연히 그는 아이누족 마을에 이르렀고, 주변의 아이누인들은 그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일본인 경찰이 순시할 때마다 그를 숨겨주거나 아이누인으로 위장시켰다고 한다. 할머니와는 그때부터 안면이 트게 되었고 곧 마음이 맞아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할머니와 평생 해로하면서 아이누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가 영면할 즈음에는 끊임없이 고향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말을 하곤 했다.

훗카이도 샤쿠베쓰 광산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높은 온도 때문에 남녀 모두 아래 속옷만 걸친 채로 투입되었다.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주변에 할머니 부부와 같은 사례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강제징용에서 탈출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아이누인들이 숨겨주곤 했고, 그 과정에서 할머니의 남편 분처럼 아예 아이누족 마을에 정착하여 결혼하고 가족을 꾸려나간 이들이 있었다.

나는 너무 몰랐다.

그리고 너무 무감했다.

할머니의 가이드가 끝나자 일행 중에서 여러 질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탁 막혀, 아무 질문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근현대 아이누족의 역사와 관련한 여러 공신력 있는 문헌들을 찾아보았다. 할머니가 한 말은 진실이었다. 많은 문헌들이 일제 시대 아이누인들과 조선인들이 약소민족이자 소수자로서의 동병상련에서 비롯된 연대와 상부상조의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이누인과 조선인 사이의 통혼은 꼭 빠지지 않았다.

나는 그때 다짐했다.

이 짧은 경험을 통해 느낀 부끄러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잊지 말자고, 그리고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그렇게 6년이 흘렀다. 그 사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나 조차도 내면에 때가 많이 묻었다. 시민단체 활동도 그만두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거창한 생각 대신 지금 필자 자신의 앞가림부터 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앞서 언급한 다짐도 조금씩 퇴색되어 갔다. 그러던 중,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인 신일철주기업에 청구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유효하다는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 뉴스를 보게 되었다. 이 뉴스를 보자마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아이누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했던 다짐도 잊고 있었다. 나의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다시 그때를 떠올려 본다. 그 때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펜을 들어본다. 지금은 살아계실지 모르는 그 아이누 할머니와 영면하신 배우자 분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에 대해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군함도만큼 처참한 지옥이였던 "샤쿠베쓰 탄광" 입구에 나열한 우리의 민족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홋카이도 탄광 및 개척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15만 명 이상이었다.

그중 2천 명이 넘는 이들이 살아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탈출에 성공한 조선인들을 보듬어준 아이누족과 매일같이 매질과 비명 속에 쓰러져간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남겨진 우리의 의무가 되었다.

 

<루카스 매거진 - 아름답고 자유로운 작가가 있는 곳>
작가 : 요르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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