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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식재료 후추, 감추고 싶은 유럽의 역사

국제 & 사회 이야기/숨겨진 역사

by Aaron martion lucas 2019. 9. 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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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 : 쌍떡잎식물로 특유의 향과 매운맛을 내며 주 원산지는 인도이다과거에는 검은 황금이라고 불릴 만큼 향신료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실제 황금으로써의 가치를 가져 많은 유럽인들이 약탈한 대표적 향신료.

후추를 먹고 죽은 사람은 없지만, 후추를 원하다 죽은 사람은 무수히 많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식재료였던 후추, 이 작은 알갱이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유럽인들은 열광하고 심지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전쟁까지 일으켰을까? 그 이유는 유럽인들의 식문화와 왕궁의 독특한 식습관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의 귀족들, 후추에 미치다

당시 중세 유럽 귀족들은 육류를 소금이나 꿀(동유럽의 경우 꿀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절여 보관하였다가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사용되는 소금과 꿀 모두 그 가격이 너무 비싸 좀처럼 사용하기 힘들었다 또한, 염장 고기의 특성상 시간이 지날 수록 누린내가 굉장히 심했고 이를 막고자 허브를 뿌리곤 했지만 허브의 향으로 그 누린내를 잡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발생한다.

상식적으로, 필요할 때만 가축을 도축해 먹으면 되지 않는가?

실제로 소금과 꿀 역시 가격이 비쌌지만 원산지가 인도였던 후추는 유럽 국가에게 마치 금과 동등한 지위를 가질 만큼 귀한 향신료였기 때문에 단순히 누린내 나는 고기를 먹기 위해 쓰인다는 것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행위였다. (현대 사회에서 고기를 금가루로 코팅해서 먹는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하기 쉬운 오해가 중세 유럽 사람들이 모두 고기에 후추를 뿌려 저장해놓은 염장 고기를 먹었을 거란 생각인데, 사실 일반적인 평민들은 주식이 빵이었으며 육류를 섭취할 때는 도축 후 최단시간에 이를 소비하였다. 따라서 후추는 단지 귀족들의 과시용으로써 사용된 것이다.

당시 후추를 고기에 뿌려 먹는다는 건 이런 느낌과 같았을 것이다.

부와 명예를 중요시 여겼던 유럽의 이러한 귀족 문화는 당시 궁중요리에서 중요시 여기는 3가지 사항을 살펴보면 더욱 극명히 나타난다. 

  1. 음식량 : 15세기 이전 유럽 귀족의 식사량은 오히려 일반 평민보다 적었으나 (하루 2회 이상 음식을 먹는것을 욕망을 참지 못해 천박하다 생각하였고 15세기 이후에 들어서야 아침식사-breakfast 문화가 생겨 3회가 되었다) 식사량에 비해 엄청난 음식이 식탁에 올려졌는데 그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 버리는 것이 곧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고결한 귀족의 모습으로 미화시켰다 이로 인해 먹지 않고 보기만 하는 앙트르메*까지 등장하는 등 음식으로 자랑질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 루이 18세가 하루에 8번 식사를 하는 등과 같이 대식가와 비만이 권력의 상징이 된것은 16~19세기 문화
    * 앙트르메 : 현대에 디저트라는 개념이지만 이전 시대엔 와인 분수, 살아있는 새를 가둔 파이, 물감을 칠한 소고기 등 먹지 않고 보기만 하는 연출 요리의 개념으로 쓰였다
  2. 색감/향 : 화려한 색상을 귀족적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음식에 온갖 착색제로 염색을 시켜 먹거나 혹은 고기에 엄청난 양의 향신료 범벅을 만들어 기존 식자재가 가진 본연의 맛을 감추는 것이 고급 요리로 여겨졌다. 현대인에게 인식된 깔끔하고 담백한 유럽풍 요리는 16세기 이후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으로 대식 문화가 발달되며 만들어지게 된다 (많이 먹어야하는데 맛이 없으면 좋을 리 없었을 테니까...)
  3. 음식 맛 : 대식 문화가 발달되지 않은 15세기까지 음식의 맛은 사실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어차피 먹지 않고 화려한 음식을 향만 맡고 버리는 것이 귀족의 덕목이었으니 맛이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이런 요소를 살펴보았을 때, 당시 귀족들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향이었을 것이다. 음식의 양과 색상은 언제든 돈만 있으면 해결되었지만 향신료의 경우 후추의 원산지가 인도였기 때문에 그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돈이 있어도 살 수없는 귀중한 사치품이 되고 말았고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에 후추향이 병균을 막아준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면서 후추를 많이 먹으면 건강해지고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인식까지 더해져 후추의 수요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렇게 온 유럽 귀족들은 갈수록 후추에 미쳐가고 있었다.

후추 항해 시대의 시작, 그리고 피로 얼룩진 아메리카 대륙

인도가 원산지였던 후추를 구하기 위해서는 동로마 제국의 중개무역을 통한 공급망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패망하자 이슬람교도는 그동안 동로마 제국이 행해왔던 지중해 무역을 봉쇄하며 유럽과 동양의 무역로를 끊어버리게 된다. 그 결과 후추의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했고 터무니없이 적은 공급에 시장 수요자들의 불만은 곧 직접 후추 무역에 뛰어들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우는 "대 항해시대"로 유럽 각국이 투자한 선단으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시작된 이 역사적 발자취는 저 조그마한 후추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 항해시대는 잔인한 피의 후추 전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후추 살인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탈리아 출신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어릴적 누구나 한 번쯤 위인전으로 그의 인생을 공부했을 만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선구자이며 유능한 리더의 표본으로 잘 알려있다. 특히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그에게 사람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비아냥대자 그는 자신을 비꼬던 사람들에게 달걀 하나를 꺼내며 세워보라고 했고,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자 마침내 콜럼버스가 달걀 한쪽 끝을 조금 깨뜨려 세우며 "신대륙의 발견도 이와 같다"라고 한 "콜럼버스의 달걀" 일화는 뭇 어린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역사적으로 재평가 받아야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지독한 야심가였으며, 잔인한 살육자였다. 당시 후추가격은 이슬람 세력의 무역봉쇄로 인해 후추 한 줌의 가격이 노예 10명분의 가치를 지닐 만큼 기형적인 시세를 보였는데, 일개 지도 제작자였던 콜럼버스는 자신의 지식대로라면 서쪽으로 항해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인도에서 후추를 가져오면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을 거란 망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의 지식이 얼마나 무지한 것이었냐면 유럽에서 일본, 중국까지의 거리를 3,700 km라고 믿었다. (실제 거리 : 19,600 km) 그의 주장대로라면 현재 아메리카 대륙의 위치가 바로 아시아 대륙의 위치 였기 때문에 그는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며 죽을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인도 발견으로 착각하며 죽었다.

콜럼버스가 생각한 망상이 담긴 지도 : 애당초 아메리카 대륙은 생각도 않했다.

서쪽으로 항해해 지구를 한바퀴 돌아 인도로 간다는 것은 현대 시대 대형 상선으로도 4개월가량이 걸리는 항로인데 지구는 평평하다는 둥 기본적인 지구 과학적 상식이 없던 시대에 그를 지원해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중 해외 영토 확장을 꿈꾸는 스페인 왕국의 공동 통치자였던 이사벨 1세의 후원을 받아 드디어 그는 야망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었다. 1942년 8월 3일 스페인을 떠난 콜럼버스 원정대는 3개월 후인 같은 해 10월 12일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첫 상륙, 위풍당당한 그의 뒤로 나무에 숨어 있는 원주민의 모습이 보인다

3개월간 망망대해를 떠돌다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의 작은섬 바하마를 그는 인도로 착각한 채 그토록 찾아 헤매던 후추를 찾기 위해 대륙 곳곳을 뒤져보지만 후추가 아메리카 대륙에 있을 리 만무했고 결국 후추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후원한 스페인 왕실에 무언가라도 가져가야 했던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금을 보고선 그들을 수탈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만큼의 금을 얻지 못하자 그는 원주민들을 모아 본보기로 여성 몇몇을 강간하고 학살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가 원하는 만큼의 금을 챙겼으며, 선원 30명가량을 지금의 아이티섬에 남겨둔 채 원주민 노예와 금을 가지고 스페인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이른다.

애초부터 1차 원정대의 선원은 주로 사면을 조건으로 승선한 죄인이나 사형수 였다. 누구도 그 미친 항해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신대륙에 풀어놓자 그곳은 곧 무법지대로 변했다.

1차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콜럼버스는 자신이 가져온 소정의 금과 노예를 보여주며 자신을 후원한 이사벨 1세에게 신대륙에 엄청난 금과 노예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2차 원정 후원을 받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신대륙 약탈을 위해 군인들을 승선시키고 무기로 무장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다. 다시 도착한 신대륙의 아이티 섬에는 이전 1차 원정 당시 남겨두었던 부하들이 온갖 만행을 저지르다 원주민에게 살해당하거나 질병에 걸려 모두 죽어 있었고, 이를 빌미로 콜럼버스는 아이티 섬을 식민지화시키며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3개월마다 콜럼버스가 지정한 할당량의 금을 채워야했으며 이를 채우지 못하면 손 발이 잘려나갔다. 여자들은 9세 소녀부터 36세 성인 여성을 모두 매춘부로 만들어 그들의 성 노리개로 이용하였으며 나머지 여자들은 노예로 팔았다. 그 결과 아이티 섬의 인구는 콜럼버스가 상륙하기전 30만 명에서 고작 500명만이 남게 되는 말 그대로 섬 하나를 통째로 씨를 말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결국은 3차 원정 도중 그의 이런 행정적 무능이 문제가 되어 본국으로 송환당하고 그마저도 선단을 후원하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무수한 빚더미에 올라 남은 인생을 허덕이게 된다. 결국 매독에 걸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후대에 그는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된다.

빌 브라이슨 : 콜럼버스와 같은 몰락을 겪기 위해선 대단한 무능과 오만이 필요한데 콜럼버스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갖춘 희대의 위인이다.
도미니카 공화국 주민 : 그가 매독으로 죽은건 그나마 이게 하느님이 내리신 아주 작은 벌일 뿐이다.

후추 살인마로 불리었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에도 인도항로는 결국 그 모습이 밝혀지지 않다가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스코 다 가마"에게 마침내 탐사되었다. 그는 콜럼버스의 인도 발견을 믿지 않았고 과감히 동쪽으로 항해해 아프리카 대륙을 지나 인도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항해하면 중간 보급이 원활하게 이어질 수 있다는 계산 하에 비교적 안전한 항로를 택한 것) 그렇게 1497년 출발한 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꿈에 그리던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유럽인 최초로 인도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후추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들은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망할 놈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대 항해시대를 이끈 3인의 항로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으로 포르투갈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전 유럽에서 해양 패권을 쥔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자 지난 콜럼버스의 삽질로 인해 갈수록 경쟁국에게 뒤쳐지던 스페인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을 후원하며 인도 항로를 넘어 세계 일주를 목표로 선단을 출발시켰다. 뛰어난 항해사 마젤란은 결국 필리핀에서 원주민의 공격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선단은 결국 3년 만에 세계 일주를 완성시켰고 인도의 후추라는 향신료 대신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되는 정향과 육두구 등 새로운 향신료를 가져왔다. 그 가격은 기존 선단 5척 중 4척을 잃고 유일하게 돌아온 1척에 실려있는 향신료만으로도 모든 항해 비용을 만회하고도 남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당시 유럽은 새로운 향신료에 정신이 나가 버린 듯 열광했다.

한낱 사치품 때문에 벌어진 이 모든 일들

앞서 말했듯 당시 귀족들은 금식을 귀족의 고결한 소양이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잔뜩 후추를 뿌려 진동하는 향을 맡고 그 음식들은 버려졌다. 냄새를 맡고 음식을 버리기 위해 필요했던 향신료 "후추". 결국 이 말도 안되는 귀족들의 탐욕으로 인해 후추를 소유하고자 수없이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렇게 후추는 다시 유럽 귀족들의 식탁에 올랐지만, 새로운 향신료를 들여온 마젤란 일주 이후 정향과 육두구 생산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은 16세기부터 20세기(근대)까지 지속적인 유럽의 수탈과 식민 지배를 받았다. 

  • 스페인 : 필리핀 지배 
  • 포르투갈 : 말레시아, 싱가포르, 동티모르, 브루나이 지배
  • 네덜란드 : 인도네시아 지배
  • 프랑스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그렇게 유럽은 역사의 승자가 되었고 향신료를 가지고 있던 나라들은 패자가 되었다. 아이티 섬이 중국이라고 생각했던 콜럼버스는 자신의 논리가 맞지 않자 지구의 모양이 동그란 구형이 아닌 호리병 모양과 비슷한 군함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정신 나간 주장을 했음에도, 발상의 전환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위인으로써 우리 아이들의 위인전에 기록되어 있다. 역사 속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콜럼버스는 없다는 것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이다. 후추가 어떤 용도로 쓰여졌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고 수백 년을 식민지로 삼아 노예처럼 부렸는지 역사의 승자는 기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 속 콜럼버스를 미화 시키고 왜곡시키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루카스 매거진 : 자유로운 작가들이 만드는 독립 잡지>
에디터 : Aaron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aaronmartinolu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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