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준생의 숨겨진 이야기] 김구는 안중근의 아들을 죽이고 싶었다

국제 & 사회 이야기/숨겨진 역사

by Aaron martion lucas 2019. 8. 13. 18:56

본문

8.15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바로 떠오를 그이름 "안중근"의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존경해 마지 않는 그 위인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 "안준생"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는 당시 조선총독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4발의 총탄을 쏜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적중한 3발은 그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저격을 두고 국가를 위한 행동이란것은 인정하지만 그 이후 과정에 대해 갑론을박이 의외로 많다. 

안중근 의사의 행동으로 합일 합병이 빨라졌고, 일제 식민통치하에 수탈이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정책을 핀 온건파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 그가 저격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거세게 몰아붙인것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암살이 성공했던 실패했던 한국은 결국 합병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정책을 핀 가장 큰 이유가 그가 주장한 "내선일체" (일본과 조선은 한몸)임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급진파보다 더욱 위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저격사건 이후 결국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불과 5개월만에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맞게된다. 그로부터 5개월 뒤 한국은 결국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안중근 의사는 역사속으로 그 이름을 남긴채 사라졌지만, 그의 가족은 현실 속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과연 일제의 가장큰 치욕을 남겼던 인물의 가족은 이후 어떤 삶을 살게되었을까?

사실 안중근 의사는 의거 직전 친구를 통해 가족에게 서신 한통을 보냈다. 연해주에 거처를 마련했고 그곳으로 지금 당장 출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서신을 받자마자 안중근의 가족은 연해주로 출발하였다. 야반도주를 하듯 떠나온 길이었지만 무사히 도착한 그곳에서의 삶 역시 안중근 가족에게 꽃길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불안속에 삶을 연명하던 안중근의 가족은 1년만에 누군가 알수 없는 이가 준 과자를 먹은 당시 7살이었던 장남 "안분도"를 잃고 만다. 이 사건 이후 가족은 안중근 의사가 마련해둔 거처를 버리고 연해주 및 중국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서야 그 부름을 받아 비로소 제대로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김구 및 임시정부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자신들의 가족처럼 돌보고 보호했고 차남 "안준생"은 지원을 받아 카톨릭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등 당시로써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잠시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에게 테러집단으로 지명받게되었고, 이에 임시정부 역시 상해를 떠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안중근의 가족은 상해에 남겨지고 말았다. 일본은 사라진 임시정부 대신 안중근 가족을 붙잡았고 이때부터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온갖 탄압속에 하루하루 생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특히 장남이 죽고난뒤 가장이 된 차남 안준생은 경계대상 1호였다. 안준생이 장성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면 일본 군인들이 들이닥쳐 훼방을 놓았다. 결국 서른살까지 안준생은 번듯한 직장조차 없이 길거리에 구걸을 하며 하루를 버티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러던 그에게 악마의 속삭임이 들렸다.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총독은 안준생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한다.

서울 박문사 라는 절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참여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과하라, 그렇게만 해준다면 지나온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겠다.

그것은 사실상 회유라기 보단 협박에 가까웠다. 이를 거절한다면 안중근의 일가족은 간신히 붙잡고 있는 목숨까지도 위협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안준생은 이렇게 말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드리고 만다.

아버지는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영웅처럼 살 수 없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도 없다.

결국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두 아들이 만났다. 이토 히로쿠니는 거만하게 안준생에게 한 손을 내밀었고 안준생이 그 손을 두손으로 잡으며 고개를 숙이자 박문사에 있던 조선인과 일본인의 탄식과 환호가 동시에 들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시 "박문사 눈물의 화해"라는 기사들이 일본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다음날 일본전역에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자식이 애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라고 소식을 전했고 안준생은 민족의 영웅 아버지를 둔 민족의 배신자 아들이 되어버렸다. 그 뒤 안준생은 미나미 총독의 양자로 들어가 이토 히로쿠니와 일본 전역을 마치 개처럼 끌려다니며 일명 "눈물의 화해"를 재현하고 또 재현한다. 당시 조선사람들은 그런 안준생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호랑이 아비에 개자식"이라 욕하고 침을 뱉었다. 심지어 김구 선생께서는 해방이 되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응징해야할 인물로 안준생을 꼽았다. 

그렇게 한국 및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한 안준생은 막대한 상금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와 가정을 꾸렸다. 그를 안아주던건 그의 어머니이자 안중근 의사의 아내 "김아려"뿐이었다. 그렇게 안준생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고, 일본의 패망이후 가족들을 전부 미국으로 보낸 뒤 혼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야기에 따르면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를 민족의 배신자라고 여긴 의사들이 모두 진료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귀국 후 1년도 되지 않아 쓸쓸히 조국에서 그의 생을 마감한다. 

민족의 변절자가 되버린 영웅의 아들 안준생(왼쪽 의자), 안중근에게 아버지를 잃은 이토 히로구니(오른쪽의자), 연출가 미나미 총독(가운데)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고.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지만, 가족에겐 영웅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순 없을 것이다. 그 시간, 그 순간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겪었을 갈등과 번뇌를 모두 이해할 순 없을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아버지의 업적을 망쳐버린 걸 떠나 그의 선택 자체가 옹호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그의 말처럼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제 2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대한민국이 더이상 굴욕의 역사를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역사 속 숨겨진 사실을 끄집어보았다.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 된다. 우리는 값비싼 교훈을 역사로부터 배웠고 이제 되풀이 되서는 안될 것이다.

 

<LUCAS MAGAZINE WRITER - 아름답고 자유로운 작가가 있는 곳>
에디터 : Aaron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aaronmartinolucas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