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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골령골에 암매장 된 한국 근대사의 상처 (보도연맹, 제주4.3 학살)

국제 & 사회 이야기/숨겨진 역사

by Aaron martion lucas 2020. 12. 2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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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동남부에는 대전시에서 가장 높은 식장산(598m)이 있다. 이 식장산을 경계로 대전시와 옥천군이 마주하고 있는데, 정상에서 바라본 야경과 도시 전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대전시와 옥천군 주민들 사이에서 등산로나 데이트코스로 인기가 있다.

대전과 옥천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야경 명소 "식장산"의 황홀한 야경
이와 대조적으로 이곳엔 우리 민족의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식장산의 남쪽 산자락 끝에는 수십년간 은폐되어온 국가폭력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불리는 산내골령골이다. 산내골령골은 한국전쟁 개전 당시 국군이 후퇴하기 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의 지시로 군, 경에 의해 수천 명의 국민보도연맹원, 대전형무소 재소자가 학살당한 후 암매장된 곳이다. 당시 미 제25 CIC 파견대의 전투보고서에 이 학살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으며,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광 에드워드 중령이 미 육군 정보부로 보낸 보고문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군도 상당 부분 개입하여 미국 정부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 중에는 국민보도연맹원 이외에도 한국 근현대사 사상 한국전쟁과 더불어 가장 많은 인명사상과 최악의 전쟁범죄가 자행된 제주4.3 관련 수형자들도 있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으로도 불리는 강경 진압 후 체포되고 육지로 끌려가 여러 형무소로 배당되어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개전기에 즉결 처형된 것이다. 산내골령골이 현대 대중매체에서 본격적으로 재조명된 것도 제주KBS에서 제주4.3 특집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4.3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이 때 제작팀에서 가볍게 시범굴착을 했음에도 유골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산내골령골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 재소자들이 인근에서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나 폐광으로 끌려가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결 처형당했다. 북한 정권의 잠재적 부역자들을 처단한다는 명분에서였다. 2020년 현재까지 한국전쟁 당시 학살 지역으로 확인된 곳은 168곳이다.

평화로워 보이는 산골 모습에 어울리지 않은 섬뜩한 학살 현장의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2020년 9 20일부터 대전시 동구청과 시민 사회 주관으로 40일간 산내골령골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10월 한낮에 현장답사 및 취재 차 산내골령골로 향했다. 산내골령골로 향하는 길목은 키 큰 나무와 갈대, 온갖 잡풀들로 둘러 싸여 있었고 그 사이로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다. 누가 보아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을의 시골 풍경이었다.

무허가로 지어진 이 교회의 밑에 훼손된 시신이 과연 몇 구가 있었을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며온다.

산내골령골 진입로에는 폐건물이 된 교회 예배당이 있었다. 폐건물이 된 지 꽤 오래되었는지 건축물이 낡아있었고 간판 색깔은 흐릿해 으스스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사실 이곳은 과거 무허가로 지어진 교회 건물이다. 이곳이 민간인 학살 현장임이 밝혀지고 관할 구청에서 건축 중지를 권고했음에도 교회 측은 공사를 감행했고, 이 때문에 유족들과 시민 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유골이 나왔음에도 공사가 강행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기 대전 지역 민간인 학살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해 온 심규상 기자에 따르면, 2001년 당시 공사 현장에서는 유골과 뼛가루가 인부들의 발에 밟히거나 채이고 포크레인과 삽날로 훼손되는 등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2007년에는 진실화해위 주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유해발굴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도 교회 측과 마찰을 빚었다. 유해발굴을 시작하면서 교회에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개토제를 열기로 했는데, 교회 측에서 예배에 방해된다며 반대한 것이다. 결국 개토제는 인근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렸다. 게다가 매장지로 추정되는 지역 상당수가 밭으로 개간되거나 도로 블럭이 깔렸다. 보다 못한 유족들이 직접 나서서 그 구역을 매각하고 잔디를 심었다. 그렇게 해서 예배당은 폐건물이 되었다. 발굴작업 당시에는 발굴단의 장비 및 짐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산내골령골은 이미 2000년대 이래로 몇 차례 발굴작업 및 탐사, 유해감식을 거쳤음에도 땅을 깊이 팔수록 유해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대략 수 미터 가량의 깊이에서부터 각 부위의 뼈들이 부러지거나 뒤엉킨 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흙과 자갈, 모난 돌덩이들에 뒤섞여 나오는 유골들을 둘러싸고 모두들 숙연해졌다. 사실 나는 외국을 여행하면서 고고학 박물관이나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을 탐방하면서 사람들의 유골을 본 적이 꽤 있다. 그럼에도 나는 발굴 현장에서 나온 유골들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가까운 사람과의 사별을 경험해 본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무게를 경험하게 된다. 나 또한 부친이 작고한 후 화장된 유해가 담긴 유골함을 받아들었을 때 견딜 수 없을만큼 무거웠던 기억이 있다. 그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는 일은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이 삶 가운데 짊어져야 할 몫이다. 그러나 여기 매장된 이들은 그 죽음의 기억마저 은폐당했다. 그리고 그 은폐된 죽음의 무게는 수십년 동안 유가족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다.

박정희 본인조차도 만주군 중위로 일제를 위해 일한 군인이었음에도, 학살 피해사건을 은폐하고 유족들에게 간첩,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유가족들에게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국가 공안 기관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3년 박정희 당시 대선후보는 '4.19 의거 계승', '한국적 매카시즘 청산'을 공언하며 당당하게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당선 이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족회가 결성되어 진상 규명을 요구하다 되려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사형 언도를 받은 유족도 있었다. 어떤 제주4.3 유족들은 간첩의 누명을 썼다. 한 역사학자는 이를 두고 '죽음마저 죽여버린 사회'라고 표현했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발굴단의 조사를 종합하여 처형 및 매장 방식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길쭉하게 구덩이를 판 후 끌려온 재소자들을 구덩이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 다음 발로 등을 밟고 머리를 쏜다. 그리고 시신을 발로 차서 구덩이에 쌓는다. 워낙에 시신이 많이 쌓여 다리나 다른 신체부위가 시체들 사이로 삐져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바윗덩어리로 찍어내린다. 그 다음 흙을 덮는다.

한 여름에 처형과 매장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각 시체가 뒤섞엔 상태로 부패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러왔을 때는 시신을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며 시취가 코를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산내골령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을 위한 위령식 모습

나는 발굴 현장에서 한 유족을 만났다. 내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현장을 답사하며 글을 쓰고 있다고 하자 그 분은 마치 가슴 속에 담아둔 것들을 토해내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어르신은 여순 사건에 연루된 한 대전형무소 재소자의 따님이었다. 철없는 꼬마 아이였던 시절 대전형무소 수감 이후 처형 이전까지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은 단 두 번이었다. 그 후로 그 꼬마아이는 집에서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아버지 영정 앞에 지폐를 가져다 두고 아버지의 귀환을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 꼬마아이는 여든 살이 가까워져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이미 날이 저물어 해질녘이 되었다. 석양빛이 폐건물이 된 교회의 십자가에 내려앉았다. 십자가가 그 때처럼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등바등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품어주리라 약속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타깝게도 저 십자가는 이곳에 묻힌 이들과 유족들에게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비무장 민간인 사상자의 비율이 유독 높았다. 그 원인은 물론 살상무기가 고도로 발달한 것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남북 양국에서 무수한 민간인들과 정치범 및 그 가족들을 '부역자' 내지 ''으로 몰아 살상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자면 이 일련의 학살들은 전시 행동에 대한 법적 체계와 인권 개념이 부재했던 전근대에 벌어진 학살이 아니다. 국제법의 기초가 다져진 지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며, 4차 제네바 협약을 통해 민간인들과 전쟁 포로들에 대한 안전 장치가 국제법적으로 마련된 이후에 자행된 학살들이다. 그것도 제각기 다른 근대적 이데올로기(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내세워 근대적 문명 국가를 자처했던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의해서 말이다.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 군인 (사망 & 실종자) 민간인 (사망 & 실종자) 군인 대비 비무장 민간인 
사망/실종 비율
남한 281,261 명 676,811 명 240 %
북한 414,000 명 1,086,000 명 262 %
합계 695,261 명 1,762,811 명 253 %

한국전쟁 중 남한 내에서 국가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의 수를 유족회측에서는 100만명, 학계에서는 30-40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한국전쟁 개전기에 벌어진 보도연맹원 및 형무소 재소자 학살만 해도 이미 수십만으로 추정된다. 다른 지역의 국가폭력 사건과 비교해 본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중국 대륙에서 자행한 난징 대학살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빗대어 '아시안 홀로코스트'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한반도 땅에서 불과 몇 달 동안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 수와 맞먹는, 아니 어쩌면 이를 훨씬 상회하는 수의 비무장한 민간인들을 국가 공권력이 살상한 것이다. 그것도 같은 동포요, 국가가 전시에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자국민들을!

우리는 근대를 거치며 무수한 곡절 끝에 엄청난 발전과 향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도 산내골령골에 연고자 없이 묻혀있을 원혼들을 떠올리며 자문해 본다. 너무 앞만 보며 달려온 것은 아닌가? 근대 국가의 신화에 가려진 은폐된 역사를 너무 방치해왔던 것은 아닐까? 나는 유럽 청교도들이 문화적, 인종적 타자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배제하면서 근대 국가를 형성시켰던 역사를 추적하면서 우리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배제되고 그 존재마저 부정당해야 했다. 근대 이래로 우리가 미국과 일본을 쫓아가면서 그 어두운 단면마저 답습해버린 까닭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근대 국가의 신화를 넘어설 때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이면속에 억울한 죽음당했던 분들을 기리며... 부디 그곳에서라도 편히 잠드시길...

 

<루카스매거진 : 자유로운 작가들이 만드는 독립 잡지>
작가 : 요르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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