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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댐, 80년대 대한민국 희대의 대국민 사기극이 만들어낸 결과물

국제 & 사회 이야기/숨겨진 역사

by Aaron martion lucas 2020. 2. 1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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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 위치한 "평화의 댐"

여러분은 혹시 이곳을 아십니까? 물 많고 경치 좋기로 소문난 우리나라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한 이곳 "평화의 댐"은 총 공사비 1700억을 들여 소양강댐(최대 저수량 29억 톤), 충주댐(최대 저수량 27.5억 톤) 다음으로 최대 저수량 26억 3000만 톤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3번째로 거대한 댐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댐"이 대체 왜 희대의 대국민 사기극으로 불리고 있는 것일까?

이 댐 안에 감춰져 있는 우리나라 역사의 부끄러운 면모를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1. 사건의 발단 김대중(DJ) & 김영삼(YS)

1,000만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김대중씨와 김영삼씨의 모습

1986년 2월 김대중(DJ)과 김영삼(YS)은 대한민국 전 국민들에게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국민 1인 개개인이 하는 현재의 투표방식) 개헌 붐을 일으키며 1,000만 서명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정권은 국민 위원이랍시고 국민들의 대리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뽑아 장충체육관에 몰아넣고 그들만의 투표를 하는 대통령 간선제 일명 "체육관 선거"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독재 군부정권의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이러한 간선제를 반대한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는 말 그대로 눈엣 가시와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변수가 발생합니다.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가 총수격인 당시 신한민주당에서 이런 발언을 하게 됩니다.

과격한 학생들의 주장을 모두 옹호할 수는 없다!
좌익 학생들은 단호히 다스려야 한다!

당시 이 발언은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을 목놓아 외치며 함께 하던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그들을 따르던 수많은 대학생들과 노동자 출신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이 발언 이후 약 4000여 명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인천에 모여 대규모 시위에 나서게 됩니다. 심지어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이 두 분은 이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삼가는 제스처를 취하였고 이것은 당시 전두환 정권에게 기가 막힌 기회가 되었습니다.

 인천에 빨갱이가 너~무 많아. 모하냐 언넝 다~~ 잡아들여 (오호 왠 떡인감?)

2. 군부의 민주화 운동 탄압 시작 

이처럼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은 많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민주화에 대한 지지 속에 자신의 정치 영향력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NL(National Libertation)계열과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PD(People's Democracy) 계열들은 위 사건을 계기로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가 더 이상 자기들의 노선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닷게 되고 자연스레 멀어지고 맙니다. 물론 두 계열 모두 진보주의를 나타내고 있지만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와 같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이 다른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김대중과 김영삼은 정치인이었습니다. 이 말 인즉, 당연히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결국 자신들이 추구하는 뜻을 이루기 위해선 선거 당선이 필수였던 것이죠. 때문에 같은 진보진영에서도 다소 공격적인 성향을 띄었던 NL계열과 PD계열과 확실히 선을 긋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 사태로 결국 덕을 본 것은 전두환 정부였습니다.

국민을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군화로 짓밟았다.

당시 군부조차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던 진보 진형의 커다란 두 산이었던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버림받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이니, 민주화 운동이니, 가리지 않고 어떤 것도 눈치 보지 않고 정말 시민들을 미친 듯 때리고 짓밟으며 군부를 이용한 폭압과 탄압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6년 10월 28일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연행된 것으로 기록된 10.28 단국대 사건이 벌어집니다. (1525명 연행 / 1288명 구속)

그런데 연행 직전 날, 방송국에서 요런 방송이 나오게 됩니다.

당시 전 국민을 떨게 했던 북한의 물공격

3. 잉? 형이 거기서 왜 나와 feat. 금강산 댐

1986년 10월 갑자기 뜬금없이 북한이 금강산 댐을 비밀리에 만들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가 나옵니다. 이유 인즉, 북한이 한국에서 열리는 1988년 올림픽을 시기하고 질투해 이를 방해하고자 200억 톤 용량의 금강산댐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죠. 당시 KBS와 SBS는 이 금강산 댐을 이용한 물 공격이 발생하게 될 경우 벌어지는 사태를 이상한 시뮬레이션으로 설명하며 서울의 3분의 1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63빌딩 역시 절반 가량 물에 잠길 것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당연히 TV 앞에서 이 뉴스를 목격한 시민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이후 국민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북한에 금강산댐 공사를 당장 중지하라는 시위가 발생했고, 정부는 아주 너그럽게? 이러한 국민들의 외침을 수렴하며 북괴의 물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안으로 평화의 댐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리하여 당시 공사비는 1150억의 예산이 책정되었는데 이 중 634억 원(전체 공사비의 55.7%)가 국민 성금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여러모로 전두환 정권은 이 시절 많은 덕을 본 정권인듯합니다. DJ와 YS가 강경 운동파를 등지고 또 북한이 때마침 금강산 댐을 건설하기까지 이렇게 복 많은 정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당시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목소리는 온대 간대 없어졌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북괴의 공격을 막아내고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지키자는 목소리로 변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민주화를 외치던 희생자들의 여론도 조용해져 버렸습니다.

<평화의 댐 발표 직전까지 논란이 된 사건들>

1986년 10월 14일 상지대 용공 유인물 조작 사건
1986년 10월 20일 용공좌경으로 지목된 10,000명 수사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 사건
1986년 11월 08일 재야민주단테 민통련 해산명령
1986년 11월 10일 반제동맹당 사건 발표
1987년 01월 14일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이 모든 것이 "평화의 댐" 건설로 사라져 버렸다.

4. 금강산 댐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만약 정말로 북한이 남한에 대한 물공격을 이유로 금강산 댐을 몰래 짓고 있었고 또, 평화의 댐이 그것이 가친 가치만큼 대한민국을 보호할 수 있다면 그래도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됩니다.

정부가 북한이 금강산 댐을 만든다던 담화가 1986년 10월 30일, 북한이 실제 금강산 댐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86년 4월 8일, 무려 7개월 전부터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한민국은 첩보력이 후져서 늦게 알아차렸을까?

동무들, 내래 금강산에 댐도 만들고, 화력발전소도 만들기라, 우리 이제 후진국 아님매, 날래 공화국으로 넘어오시라요.

아닙니다. 북한은 오히려 4월부터 시작된 금강산 댐 공사를 자신들의 우월한 기술력으로 댐을 만들어 금강산에 전력발전소도 만들 계획이라며 온 동네방네 자신들의 업적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정작 1986년 4월 당시 전두환 정부는 북한이 그렇게 전 세계에 자랑하고 싶던 금강산 댐 건설을 북한의 업적처럼 포장하여 보도하기 싫었고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였지요. 결국 전두환 정부의 어떤 기똥차게 머리 좋은 인물이 자신들의 만행을 덮어버리기 위한 용도로 일명 "평화의 댐" 공작을 사용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5. 좋아, 일단 만들긴 했으니 평화의 댐의 효용가치는 얼마나 있느냐?

(1) 먼저 정부의 시나리오대로 북한이 남한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150억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 기술로는 최소 금강산 댐 주변에 3개 이상의 보조댐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20톤 트럭 1000대가 하루 종일 건축자재를 날라도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립니다. 1986년 금강산댐 건축을 발표하였으니 북한 정부가 정말 있는 돈 없는 돈 다 갖다 부어서 원활하게 공사를 마친다고 해도 1999년 완공되는 것입니다.

(2) 2003년 북한은 그래도 17년이나 걸려 어떻게든 금강산 댐을 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부가 말한 150억톤, 200억톤은 커녕 고작 최대 저수량 26억톤에 불과한 댐이 바로 금강산 댐입니다. 26억톤.... 금강산 상류에서 부터 서울 한강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에도 있었던 소양강댐(최대저수량 29억톤), 춘천댐(최대저수량 1억5천톤), 의암댐(최대저수량 8천톤), 청평댐(최대저수량 1억8천톤), 팔당댐(최대저수량 2억5천톤) 도합 약 35.6톤의 저수량을 가진 댐들이 즐비해 있는데 구태여 여기에 최대 저수량 26억 톤이 넘는 댐을 짓는다? 이건 무슨 개소리야?

(3) 지어지지도 않았지만 만약 북한이 150억 톤 저수량이 가능한 댐을 지었다고 친들, 이 댐에 150억 톤 물을 다 채우려면 우리나라 강수량 및 금강산 상류의 유량을 감안하면 적어도 14년이 걸리게 됩니다. 고로, 150억 톤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금강산 댐이 있다고 가정하면 2003년 완공한 이 댐이 그나마 제기능을 하기 위해선 2017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죠. 말 그대로 그런 북한의 위협이 정말 있었다면 댐이 완공된 걸 지켜본 뒤에 설렁설렁 짓기 시작해도 충분히 대응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평화의 댐"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세워진 이후 감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전두환 정권이 북한의 물폭탄 위협을 부각해 당시 금강산 댐의 최대 예상 저수량 70억 톤의 보고를 200억 톤으로 과장해 보도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5공화국의 실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대한민국 국정 역사상 사상 초유의 대국민 사기극 속에서 선량한 국민들은 진정으로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국민성금에 동참하여 661억 874만 2761원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쓸모없는 평화의 댐 콘크리트와 함께 버려졌습니다. 단지 단 한 명의 권력과 야망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말이죠, 그러기엔 그 마음과 비용이 너무나 많이 소모된 것은 아닌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국민 성금을 위해 발행한 "평화의 댐" 성금 뱃지 달기 대회가 유행이었다.

훗날 워싱턴 포스트는 대한민국의 평화의 댐 건설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북한의 "물 폭탄" 공격으로부터 서울 올림픽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 무려 2억 5000만 달러를 소모하면서까지 댐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이 조용히 사그라든 지금, 이것은 불신과 낭비적인 측면에서 사상 최고의 기념비적인 공사가 될 것이다.

- 1988년 08월 01일 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 중 -

 

<루카스 매거진 : 자유로운 작가들이 만드는 독립 잡지>
에디터 : A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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