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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볼 만한 곳] 쓸모의 재생, 선유도 이야기

생활 정보 이야기/국내 여행 일지

by Aaron martion lucas 2019. 12. 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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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섬에는 길게 뻗은 자작나무와 맞은편의 복숭아나무, 커다란 밤나무와 소나무,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다. 빛과 그늘, 온도와 습도에 따라 다르게 자라나는 식물이 빼곡하다. 15년이 넘는 시간이 다시 차곡차곡 쌓였다.

봄에는 자생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도록 수련, 연꽃, 창포, 물옥잠, 갈대, 붓꽃, 갯버들 같은 수생 식물과 습지에서 자라는 고사리와 이끼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섬은 늦가을 혹은 겨울에 찾는 것도 좋다. 나풀대던 잎이 지고 회색 콘크리트 구조물을 휘덮던 덩굴식물이 시들면, 정수장 건물의 콘크리트 벽체와 녹슨 관들이 드러난다. 태어났다 다시 소멸하는 섬의 풍경이 아련한 시간의 실체를 그려내고 있다.

# 윤회와 환생

양화대교 중간에 배 모양으로 길게 누워 있는 섬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해발 40m 높이의 선유봉(仙遊峰)이었다. 주변에는 드넓은 모래벌판도 있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에는 신선들이 유람하며 즐겼다는 선유봉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이 잘 담겨있다.

첫 변화는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을축년, 큰 홍수가 나면서부터 시작됐다. 한강 정비의 명목으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내쫓겼고, 한강변에 둑을 쌓으면서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 크게 훼손당했다. 여의도 비행장 확장 때는 모래와 자갈을 내어 주는 골재 공급처로 쓰여 봉우리의 돌과 흙이 절반도 넘게 깎여나갔다.

광복 이후에도 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또 암반을 깎아 선유봉은 평지로 변했고, 1962 6월부터 1965 1월까지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건설하면서 선유봉은 완전히 사라졌다. 1968년 시작된 제1차 한강개발사업 때는 선유봉 주변에 7m의 옹벽을 치고 선유봉과 한강 남단 사이에 있던 모래를 모두 퍼내 강변북로를 만들었다. 봉우리가 있던 자리는 지금의 납작한 섬이 되었다.

1970년대 경제발전과 더불어 서울 인구가 늘어나자, 이번에는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선유도에 한강물을 정수하는 공장이 세워졌다. 1978년 영등포 공단지대를 시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다가, 한강물이 점점 오염되면서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2000년에 선유정수장은 결국 폐쇄되었다.

버려진 정수장은 오염된 한강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다시 공원으로 변신한다. 남은 정수장 시설물을 일부러 꾸미지 않고 물을 주제로 재활용하고 그대로 살려서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시설 재활용 환경재생 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섬은 2002 4 26일 마침내 선유도공원으로 개장되면서 시민의 곁으로 돌아왔다.

선유도는 우뚝 솟은 봉우리에서 채석장으로 변했고, 다시 정수장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생태공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변신을 거듭한 네 번의 윤회와 환생이었다.

# 선유도공원

수돗물을 공급하던 정수장으로 23년 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선유도 일대 11 4천 제곱미터의 공간과 기억들은 조경가정영선과 건축가 조성룡의 손에 건져져 새 생명을 얻었다. 기존 건물과 어우러진 녹색 기둥의 정원, 시간의 정원, 물을 주제로 한 수질정화원, 수생식물원 등이 조성됐다.

선유도공원은 물을 저장하는 콘크리트와 물과 식물의 합작품이다. 가장 아름다운 제1여과지는 하천이나 늪지에서 자라는 습지식물이 콘크리트 그릇에 담겨 있다. 자갈과 모래로 채워졌던 제2여과지는 상판을 들어내고 주차장으로, 1침전지는 시간의 정원으로, 침전지의 상부 수로는 수생식물 정원으로 물을 실어 나르는 물길로 꾸며졌다. 약품침전지는 부레옥잠이나 연꽃 같은 수생식물을 키우는 식물원이 됐고, 취수펌프장은 한강을 조망하는 카페테리아 나루가 됐다. 전망대를 뚫고 나온 미루나무는 생명과 바람의 존재를 실감 나게 한다.

선유도 전망대에 올라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강을 가로지르는 붉은 아치의 성산대교가 보인다. 다리 너머엔 난지 하늘공원과 상암 월드컵경기장, 남쪽에는 목동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양화대교와 합정동의 마천루가 불야성을 이룬다. 선유정 정자 맞은편은 누에머리 모양의 옛 잠두봉절두산 성지다. 조명을 받은 망원정도 눈에 들어온다.

선유도공원은 쓸모를 다한 산업유산을 보전하고 활용했다는 역사성과 파괴된 도심생태계를 복원했다는 자연친화성, 그리고 한강 중간에 떠 있다는 드라마틱 한 장소성까지 좀처럼 이루기 힘든 3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다.

축적된 시간의 농밀한 흔적들 사이로 건축적 산책의 즐거움이 더해진 선유도공원은 문화적 공원을 갈망하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장 3년 만인 2005년에는 주말 하루 평균 이용자가 4만 명이 넘는 통에 공원 보호 차원에서 입장객을 동시입장 1000명으로 제한하는 입장정원제를 실시해야 했다.

# 산책

선유도공원은 낡은 것에 대한 재생, 산업유산에 대한 문화적 계승이라는 건축의 시대적 패러다임을 일반 대중에게 선보인 첫 국내 작품이다. 강 건너 당인리발전소 활용의 생각도 선유도공원의 경험에서 시작됐다.

 선유도공원은 2013년 건축 전문가 100명이 꼽은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최고의 현대건축 20선 가운데 개별 건축물이 아닌 장소적 특성을 띤 것은 선유도공원이 유일하다.

2002년 우리 곁으로 돌아온 선유도공원은 과거의 기형적 생성과 변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의 시민공원이다. 하나의 공원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몰리는 현상은 역으로 공원이라는 일상적 장소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경험의 부재를 입증한다.

선유도공원을 조성한 정기용과 조성룡은 이곳을 테마공원이나 유원지쯤으로 여기며 분주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공원에서는 한곳에 머물러 주변과 스스로를 돌아볼 뿐이라는 것이다. 공원이란 특정한 목적을 갖고 무언가를 둘러봐야 한다는 강박으로 오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늦가을, 섬을 산책했다. 쓸모를 잃고 버려진 공간이 새것보다 더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 해를 겪은 쓸쓸한 풍경 속에는 풍성한 시간이 축적돼 있다. 우리의 지난 한 해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선유도 공원 가는 길

 

<루카스 매거진 : 자유로운 작가들이 만드는 독립 잡지>
작가 : 문학적 저널리스트 "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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