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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간월재 탐방기] 바람마저 쉬어가는 찬란한 은빛 억새 평원

생활 정보 이야기/국내 여행 일지

by Aaron martion lucas 2019. 11. 1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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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내고개에서 시작한 하늘억새길 산행은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다. 원만한 경사지만 오르막길이 계속돼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걷는 산길이 높아지고 올려보던 산들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수려한 산세가 눈앞에 펼쳐진다. 언제부턴지 사람들은 이 일대를 '영남알프스'라고 불렀다.

울산 울주를 기준으로 경남 밀양과 양산, 경북 청도와 경주가 만나는 '영남알프스'는 북으로는 간월산과 가지산, 서쪽으로는 재약산과 천황산, 남으로는 신불산과 영축산 등 아홉 산이 해발 1천 미터 이상의 능선으로 연결된다. 나는 지금 간월산을 오르고 있다. 신불산과 만나는 곳의 고갯마루에 닿을 생각이다.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젖은 이마를 식히는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길을 꽤 오랫동안 걷는다. 고요한 햇살 속에서 부지런한 산새 소리만 이따금씩 바람에 흩날릴 뿐, 구름바다는 세상의 모든 소음과 잡념을 집어 삼킨다. 도시에서 분주했던 발걸음들이 느린 걸음으로 다시 스쳐 지난다.

지난 여름은 성실하지 못 했다.

낡은 구두에 흙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을 무렵, 건너편 신불산과 간월재 능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높은 산 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군락을 이룬 억새가 은빛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바로 이곳이 간월재다. 동서남북 어디든 시야에 닿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이다.

억새밭은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 간월재에 10만 평, 신불산과 영축산 사이에 60만 평, 고헌산 정상 부근에 20만 평이 펼쳐져 있다. 재약산과 천황산 동쪽 사자평에도 약 125만 평에 걸쳐 억새밭이 이어진다고 한다.

'바람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불리는 간월재는 우리나라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억새 평원으로 꼽힌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는 마치 은빛 물결이 일렁이는 듯 황홀한 모습을 연출한다. 억새가 잔잔한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속삭임이 귀를 간지럽힌다.

허연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이리저리 물결치는 억새 들판 위로, 온유한 햇살은 때로는 바람과 운무로 태도를 바꾸고 몰려든 검은 구름이 고개를 넘는다. 옷을 여며보지만 손이 시리다. 이 모두가 간월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대자연의 소소한 변화일 뿐이다.

오래전 간월재는 삶의 길이었다. 배내골 주민, 울산 소금장수, 언양 소장수, 장꾼들이 줄을 지어 넘었다. 주민들은 시월이면 간월재에 올라 억새를 베 날랐다. 벤 억새는 다발로 묶어 소 질매에 지우고 사람들은 지게에 한 짐씩 지고 내려와 억새지붕을 이었다.

산은 하늘과 맞닿은 곳에 나를 불러 세워놓고 나의 불성실을 꾸짖는다. 산은 계절을 일러주고,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작은 삶들을 바라보게 하고, 다리의 피곤과 목의 갈증을 가르친다.

억새 군락지 사이로 나무 데크 탐방로가 조성돼 있어 이 모습을 보기에 한결 편안하다. 간월재 휴게소와 대피소는 이런 풍경화에 잘 어울린다. 억새 무리 사이를 갈라놓은 나무 데크 계단이 을씨년스럽지 않은 건물과 어우러져 오히려 알프스 본고장의 서정성을 느끼게 한다.

한 시간 반 머물기 위해 한 시간 반 산을 오르고 다시 한 시간 반 산을 내려가야 한다. 삶은 종착지 없는 길의 연속인지 모른다. 그리고 길의 곳곳엔 은빛으로 물든 찬란한 지점들이 있기 마련이다.

 

울산 간월재 가는 길

 

<루카스 매거진 : 자유로운 작가들이 만드는 독립 잡지>
작가 : 문학적 저널리스트 "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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