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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쟁취한 발칸 반도 국가들이 구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이유

국제 & 사회 이야기/숨겨진 역사

by Aaron martion lucas 2021. 1. 2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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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유럽의 발칸 반도를 서아시아 지역과 더불어 세계의 화약고로 칭하곤 한다. 발칸 반도는 역사적으로 여러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해왔던 지역이며, 냉전 종식 후 유고 연방(현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해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북마케도니아, 코소보를 포괄하는 지역)이 붕괴되면서 각 민족, 종파 간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 난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발칸 반도, 그 중에서도 특히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문화, 종교의 모자이크' 지역으로 칭하기도 한다. 그만큼 비잔틴, 터키, 러시아, 서유럽 등지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교차하며 공존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곳은 아직까지도 현대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는 지역이다.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우는 "발칸 반도"의 모습

2017년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에서 과거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속했던 나라의 국민들을 상대로 '유고 연방 붕괴가 자국에 미친 여파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유고 전쟁에 비교적 적게 개입했으며 피해도 적었던 슬로베니아의 경우 긍정, 부정이 41%, 45%로 비등하게 나왔다. 유고 전쟁의 주요 당사국으로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컸지만 가장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크로아티아는 긍정 55%, 부정 23%로 긍정이 크게 우세했다. 비교적 최근(2008)에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한 코소보 역시 75%로 긍정 평가가 압도적이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몬테네그로와 더불어 '유고 연방'의 타이틀을 가장 오래 유지했으며, 서방 강대국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세르비아는 긍정이 겨우 4%, 부정이 무려 81%로 부정 여론이 압도적인 다수였다. 보스니아 쪽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긍정이 6%, 부정이 무려 77%로 사실상 세르비아와 더불어 유고 연방을 조건부 내지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온 것이다.

보스니아를 비롯해 유고 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많은 나라들이 오히려 유고 연방 시절의 향수를 품고 있다.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디른 당사국들의 전쟁범죄와 인종청소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보스니아측 역시 전쟁 당시 타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와 학살의 혐의에서 자유롭지만은 않다) 국민들이 그만큼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독립을 쟁취했음에도 유고 연방 자체에 대해서는 다소 전향적이고 복합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인'의 개념과 더불어 유고 전쟁의 기본적인 성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시절 구성국들의 국기, 연방 아니랄까봐 지금과 달리 거의 비슷비슷하다.

'유고슬라비아' '남슬라브인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유고슬라비아의 각 민족이 남슬라브인들로써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단결해야 한다는 근대적 민족주의, '유고슬라비즘'은 의외로 훨씬 옛날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는 민족, 종파 간 갈등을 넘어 외세(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 지배자들에 저항해야 한다는 근대적 민족주의가 싹트고 있었다. 후대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공식 이념이 된 유고슬라비즘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 나치, 반 우스타샤 민족해방운동을 펼치면서 각 민족, 종파 구성원들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였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의 경험에 근거하여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지양하며 민족 간 화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가 탄생한다. 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즘과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기치로 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인물이 바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다.

사회적 애국주의라는 기치 아래 세워진 유고연방의 초대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

이렇게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건국된 이래로 공화국 내 각 민족 주민들은 같은 '유고슬라비아인'으로서 공존했으며, 다른 민족 및 종교 집단의 구성원과 통혼하여 가정을 꾸린 사례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몬테네그로인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할만큼 언어적으로도 동질성이 컸다. 때문에 유고 전쟁을 일반적인 개별 국가 간 전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유고 전쟁은 과거 동족 상잔의 비극이었으며, 당사국 양측에서 전쟁범죄와 학살이 자행된 한국전쟁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유고 전쟁 역시 독립을 표방한 각 민족 국가들 사이에서 인종청소와 범죄가 자행되었으며, 강대국들은 이 전쟁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교묘하게 관철시켰다.

유고 내전 중 벌어진 대표적인 학살 사건,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보스니아 내전당시 일어난 이 학살의 피해자는 8,0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위), 수습된 시신들을 공동 묘지에 안장한 모습(아래)

한편, 서방의 주류 미디어에서 구 유고슬라비아를 다룰 때 간과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고 전쟁 당시 세르비아측이 각종 전쟁범죄와 학살,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르비아측 역시 유고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전쟁범죄와 인종청소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이다. 학살, 인종청소, 전쟁범죄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호적으로 발생했다. 크로아티아가 분리독립을 선포하며 군대를 세르비아계가 상당수 거주하는 크라이나 지역으로 진군시키자 수십만에 이르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난민이 되었으며, 미처 피난하지 못한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대해서는 인종청소 및 학살 등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뒤따랐다. 이후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하는 과정에서 코소보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각종 인권침해와 보복 학살, 인종청소가 발생했다. 게다가 미국을 위시한 NATO는 인권을 명분으로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세르비아를 무차별 폭격하기까지 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에는 민족, 성별을 불문하고 반 나치를 외쳤으며 이후에도 민족 갈등을 억제시키는 세력이 되었다.

둘째로, 티토 집권 당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남슬라브안들의 단결을 내세우며 대 크로아티아주의 및 대 알바니아주의를 비롯한 각 민족의 민족주의 및 분리주의를 억눌렀지만 세르비아의 팽창과 패권을 꾀하는 대 세르비아주의 세력 역시 효과적으로 억제했다는 점이다. 1974년에 티토 정부는 '신헌법'을 발표함으로써 세르비아인들과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지닌 동시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오랫동안 거주해온 코소보에 자치권을 부여한다. 세르비아 국수주의 세력은 서방의 주류 언론에서 조명하는 것과 달리 유고슬라비아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해온 시장 사회주의, 남슬라브인들 사이의 화합과 단결을 꾀하는 유고슬라비즘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실제로 세르비아 국수주의 세력은 티토 집권기에도 도청을 하는 등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균열을 내려 했으며, 티토 사후에는 노골적으로 티토를 깎아내렸다. 애초에 티토 자체가 크로아티아 쿰로베츠 출신이며, 부모 모두가 로마 가톨릭 교도인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 당시 티토를 비롯하여 반 나치, 반 우스타샤 민족해방을 이끈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의 지도자들 중에는 크로아티아계와 슬로베니아계가 상당수 포함되어있었다. 티토와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은 이처럼 나치 독일, 우스타샤로 대표되는 크로아티아 파시스트들과 대결하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향후 이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민족 간 갈등의 불씨를 잠재웠던 것이다.

구 유고연방은 비록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지만 소련 중심의 종속적 공산화를 거부하고 중립적 노선을 택했다.

구 유고슬라비아가 재평가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다른 현실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여러 측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양극화되면서 냉전의 시대로 접어든다. 바야흐로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이분법적인 정치 논리가 전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다. 미국과 소련은 이 냉전 체제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패권을 팽창시킨다. 유고슬라비아 역시 전후에는 반 나치 및 반 우스타샤 투쟁 당시 동맹국이자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형제 국가로서 소련과 제휴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티토는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를 소련의 위성국가 체제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외세의 오랜 간섭과 민족간 갈등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던 유고인들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와 소련을 중심축으로 한 동구권 블록 중 그 어느 편에 대해서도 종속을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유고의 이러한 자주성 지향은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렸고, 급기야  '티토-스탈린 결별' 사건으로 양국의 수교마저 중단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포름(국제공산당 정보기구)으로부터 영구제명당했으며, 소련 뿐 아니라 다른 공산권 국가로부터 외교적, 경제적 지원이 끊김으로써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독자 노선을 택했지만 구 유고 연방은 사회주의 체제와 시장 경제를 혼합하여 해체전까지 매우 높은 GDP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새로운 실험을 감행한다. 바로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 골격을 바탕으로 시장경제를 대폭 수용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적인 노동자 복지 제도를 유지하고 국가 기간산업을 육성하면서 동시에 기업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기업간 자율 경쟁을 장려했다. 그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소련 및 중국식 공산주의 뿐 아니라 서방의 자본주의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경영 문화가 탄생하는데, 바로 '노동자 자주 경영' 체제이다. 소수의 주주나 기업주들만이 아니라, 노동자들 스스로 기업 경영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 자주 경영, 시장경제가 도입된 유고슬라비아 특유의 사회주의를 흔히 '시장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티토의 노동자 자주 경영체제를 한국의 '우진 교통'이 선택하여 부도난 회사를 노동자들이 인수함으로써 재기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시장 사회주의와 노동자 자주경영 체제, 독자노선을 바탕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전성기 시절에 경제, 문화, 복지에 있어 서방 선진국에 필적할 정도까지 이른다. 동시에 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임에도 주민들이 상당한 정도의 문화적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문화예술 산업 역시 왕성했다. 소련과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서방 세계에 문을 열어 놓는다. 게다가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 또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로 유고슬라비아에 눈독 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서방 세계의 문화콘텐츠들이 큰 제재 없이 소비되고 향유되었다. 참고로 이 시대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지역은 문화 검열이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유고 지역의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문화를 바탕으로 서방 세계의 대중문화콘텐츠를 흡수하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예술 세계를 창출해 낸다. 유고슬라비아 록 씬의 선구자 중 한 명이자 세계적인 현대음악 작곡가로 손꼽히는 고란 브레고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예술가로써 자신의 예술 여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고슬라비아는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이라는 무수한 세계들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음악이 있어 나는 나 자신 이외에 그 어느 쪽도 대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의 최초의 언어이자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는 언어인 음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 작곡가 '고란 브레고비치' -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우크라이나, 시리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에서 발생한 무력충돌 소식을 접하며 이런 부질없는 상상을 해 본다. 만약에 유고슬라비아처럼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 노선을 추구하는 중간 지대가 있었다면. 냉전 종식 이후 더 이상 견줄 세력이 없어진 미국의 패권이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그 극으로 치닫고 있는 한편으로 러시아와 중국이 그 신생 세력으로서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구 유고슬라비아처럼 양극 사이에서 완충 지대를 자처하는 세력이 있었다면. 호불호를 떠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은 세계가 양극으로 치닫던 냉전 시대에 주권 국가로서 존엄성을 지켜며 균형추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에서 서로 다른 종파적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에 대한 향수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이해할 만하다.

1989년 티토가 죽자 많은 국민들은 슬퍼하였고, 결국 그의 사후 3년만에 연방은 무너지게 된다. 

 

<루카스매거진 : 자유로운 작가들이 만드는 독립 잡지>
작가 : 요르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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