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파블로 네루다와 빅토르 하라 : 시와 노래로 테러를 이겨낸 예술가들

국제 & 사회 이야기/숨겨진 역사

by Aaron martion lucas 2020. 9. 28. 15:13

본문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네루다는 연애시집에서 왜 절망을 노래했을까?

 ... 차가운 꽃부리들이 내 머리 위에 비 오듯 쏟아진다.

오, 파편 구덩이, 난파한 것의 사나운 동굴.
네 속에 전쟁과 싸움은 축적되었다.
너로부터 노래하는 새의 날개는 솟아올랐다.

너는 모든 걸 삼켰다먼 거리처럼.
바다처럼시간처럼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그건 공격과 키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등대처럼 반짝인 마법의 시간이었다.

조타수의 두려움, 눈먼 잠수부의 격렬함,
사랑의 광포한 취기,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안개의 어린 시절 내 영혼은 날개를 달았고 상처 받았다.
길 잃은 발견자,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너는 슬픔을 띠 둘렀고, 욕망에 매달렸으며,
슬픔에 비틀거렸다, 네 속에 모든 게 침몰했다!

나는 어두운 그림자의 벽을 열어젖혔고,
욕망과 행동을 넘어서, 계속 걸었다.

 ...(생략)

-절망의 노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지음)-

칠레 현대시 문학의 거장 "파블로 네루다"

상기된 시는 파블로 네루다가 소년 시절의 격정에 찬 연애 경험과 자신이 직접 쓴 연애편지들에 기반하여 19세 때 쓴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마지막 시편인 <절망의 노래>에서 발췌한 구절이다. 사실 네루다는 칠레 및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저항 시인으로 각인되어있지만 아주 감각적인 연애시들을 창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네루다가 나고 자란 마울레주 또한 칠레산 와인 제조에 이용되는 포도밭의 전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같은 고향의 경관도 네루다 시 특유의 로맨티시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 결정체가 바로 본 시집인 것이다. 이 시집으로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현대시문학을 대표하는 기린아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런데 네루다는 왜 소년 시절의 열정과 추억을 담은 시집의 마지막 편을 하필 <절망의 노래>로 한 것일까? 연애의 황홀경과 감각적인 욕망에 따를 수밖에 없는 고통과 씁쓸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르트르는 말했다. 문학예술은 대자와 즉자,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상호작용이라고. 사르트르의 문학 예술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네루다의 연애 시는 곳곳의 독자들과 만나면서 민중적이고 세계적인 체험이 되었다. 시인으로서 네루다가 위대한 것은 이 때문이다.

네루다의 로맨틱한 시와 별개로 칠레는 군사독재 정부 붕괴 이후에도 아직까지 민중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가 출판되고 100년이 가까워진 지금, <절망의 노래>는 라틴아메리카 현대 민중사와 냉혹한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와 기묘하게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특히 칠레는 20세기에 걸쳐(사실 지금까지도) 온갖 사회 정치적 욕망과 이해관계가 휘몰아치고 서로 충돌했던 곳이다. 또한 강대국의 간섭과 독재에 맞선 민중적인 투쟁이 결실을 맺기도 하고 좌절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네루다의 시를 통해 전해진 칠레의 경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적 부조리와 압제적 정권, 강대국들의 폭력적인 패권으로 인해 고민하는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대한민국 5공 시절에 문화 제재가 횡행했음에도 네루다의 시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광범위하게 소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네루다는 시를 통해 칠레의 경험을 국지적인 것을 넘어선 보편적이고 범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빅토르 하라(Victor Jara)의 기도

우리를 비참함 속에 가두어 두는 주인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의와 평등의 왕궁이 임하옵시며
높은 산길에서 들꽃을 바람에 날리게 하듯 우리에게 불어오시며
불처럼 내 총의 총구를 깨끗이 해 주시며
당신이 이 땅에서 마침내 뜻을 이루시듯
우리에게 힘과 투쟁할 용기를 주소서

일어서라
너의 두 손을 보아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라
지금도, 우리가 죽는 그 시간에도
아멘

- 빅토르 하라의 노래 <Plegaria a un laborador>(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 가사, "빅토르 하라, 누에바 칸시온의 혁명적 순교자", 한상봉, 가톨릭일꾼 2020 1월6일 자 기고문 중 발췌

그의 노래는 민중들로 하여금 자유와 해방을 노래하게 하였고 처형 이후 혁명적 순교자로 칠레 국민의 마음에 남겨졌다.

네루다와 더불어 칠레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자 음유시인, 종합예술가로 손꼽히는 빅토르 하라의 목소리와 가사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네루다의 시와는 달리 어딘가 엄숙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6세 때 노동을 시작해야 했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 하라의 어머니 혼자 가정을 부양해야 했다. 어린 하라에게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어준 곳은 교회 음악과 복음의 메시지가 울리는 성당이었다. 그에게서 신앙의 열정을 발견한 한 사제의 추천으로 하라는 신부가 되기 위해 수도원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계적 구조와 제도권 종교에 대한 회의, 자신 안에 억압된 격정과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신학교를 뛰쳐나온다. 그 이후로 그는 교회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 복음과 그에 근거한 사회적 실천에 대한 믿음은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신론자가 된 파블로 네루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달리 하라는 그리스도교 복음과 가톨릭의 사회적 교리에서 출발하여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때문의 그의 노래에는 십자가, 그리스도, 고난, 성모마리아의 이미지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그가 군부 쿠데타 세력에게 끌려가 무참히 살해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에 담은 절규도 어쩌면 이러한 신심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목격자들과 가해자들의 증언으로 전해지는 그의 최후도 어딘가 종교적 순교자를 연상시킨다.

빅토르 하라, 민중의 순교자로서 쿠데타 세력의 십자가에 못 박히다.

..파시즘의 얼굴들이 자아내는 공포를 보라!
저들은 계획을 칼날같이 수행해 나간다.
저들에게는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다.
저들에게는 피가 훈장이다.
도살이 영웅적인 행동이다.
, 신이여, 이것이 당신이 만든 세상입니까?
7일 동안 기적과 권능으로 일하신 결과입니까?

...(중략)

멕시코여, 쿠바여 그리고 온 세계여
이 잔학 행위에 맞서서 절규하라!
우리는 1만 개의 손들
이제는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손들.
이 나라 전체에는 얼마나 될까?
우리의 동지, 우리의 대통령이 흘린 피는
폭탄이나 기관총보다 더 강하게 그들을 치리라!
우리의 주먹도 그처럼 다시 치리라.

...(생략)

- 빅토르 하라의 마지막 시, <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

세계 최초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앗지만 경제 정책은 파산을 가져왔고 쿠데타의 빌미가 되었다.

1973 9 11, 칠레에서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라디오 방송으로 긴급 담화를 내보냈다. 바로 칠레의 참모총장 및 국방장관을 지낸 군 장성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미국의 지지와 묵인 하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날이었다. 아옌데는 자신이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며 노동자, 농민, 학생, 자영업자들 모두가 침착한 마음으로 각자의 본분에 충실할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결사항전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아옌데 본인도 이를 직감했던 것 같다.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 궁이 폭파되고 아옌데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권총으로 자결했다.

칠레 쿠데타 이후 국립 종합운동경기장은 수용소로 변했고, 빅토르 하라 역시 이곳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곧이어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에 대한 무단 구금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이 칠레 종합운동경기장에서의 학살이다. 군부는 쿠데타 감행 후 며칠간 감옥에 구금시킨 반대파 인사 및 시민들을 칠레 종합운동경기장으로 이송시켰다. 그곳에서 수천 명이 총살당하고 수만 명이 고문을 당했다. 이때 빅토르 하라도 끌려가 고문당한 뒤 총살당했다. 그가 총살되기 전 군인들이 그의 손목과 손가락을 부러뜨린 뒤, 어디 한 번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보라고 조롱했다. 하라는 의식이 거의 혼미해진 상태에서도 자신이 자주 불렀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선거 캠페인의 시그니처 송이기도 한 <Venceremos>(승리하리라)를 힘겹게 불렀다. 이에 화가 치민 군인들이 빅토르 하라의 혀를 잘라낸 뒤 총탄 44발을 난사했다. 그의 나이 겨우 40세였다. 그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의 것과 더불어 연고자 없는 시신으로 유기될 뻔했지만 아내이자 동지였던 조안 하라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수습했다.

칠레 쿠데타 그 이후...

빅토르 하라가 그렇게 잔혹하게 사살당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네루다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그는 병상에서도 피노체트의 쿠데타와 미국의 공모를 규탄하는 시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쿠데타로 인해 그가 강한 고립감과 좌절을 느꼈고, 지병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 같다. 쿠데타와 제국주의가 사실상 두 귀중한 예술가들의 생명을 앗아간 셈이다.

45년만에 빅토르 하라 처형 조사가 시작되었고 부검을 마친 뒤 이장되고 있는 모습

빅토르 하라에 대한 고문과 살인에 가담한 군인들은 피노체트 정권이 국민투표로 무너진 이후에도 처벌되지 않았다. 직접가담자 중 한 명은 미국인과 결혼한 뒤 미국 시민권을 얻고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 칠레 정부와 조안 하라, 세계의 여러 인권 단체가 미국 정부에 그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조안 하라와 인권 단체들의 오랜 법정 투쟁 끝에 2018년에 들어서야 이들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

Venceremos! (승리하리라!)

봄이 벚나무와 하는 것과 같은 걸 너와 함께 하기를.

- 파블로 네루다 -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칠레의 9.11', 혹은 '1 9.11 테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30여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 벌어진 9.11 테러와 구분하기 위함이다. 지금도 여전히 칠레 사람들은 '9.11'하면 미국에서의 9.11이 아닌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를 먼저 떠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빅토르 하라가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외쳤던 것처럼, 결국 종국에 승리한(venceromos) 것은 피노체트와 그 끄나풀들이 아니라, 빅토르 하라와, 국경을 넘어 그의 노래를 열창하는 세계 시민들이다. 하라와 네루다는 죽었지만 그들의 시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들을 죽인 정치군인들보다도, 제국의 권력을 등에 업은 무시무시한 미국의 비밀요원들보다도 말이다.

생전 빅토르 하라의 공연 영상

빅토르 하라를 위시하여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 인티 이이마니(Inti Illimani), 낄라빠윤(Quilapayun) 등 칠레 민속음악을 현대적 민중가요로 재해석하고 대중화시킨 이들의 음악을 총칭하여 '누에바 깐시온'('새로운 노래'라는 뜻)이라고 부른다. 누에바 깐시온은 칠레를 넘어 영미권 팝 음악 중심인 세계 대중음악 시장에 '월드뮤직'(사실 이 용어 자체가 다분히 미국 중심적인 함의를 띄고 있지만 대체할 다른 용어가 없고 고유명사로 굳어져 그대로 쓴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빅토르 하라의 목소리와 네루다의 시가 있다.

 

<루카스 매거진 : 자유로운 작가들이 만드는 독립 잡지>
작가 : 요르고스
루카스 매거진의 애드센스 수입은 "세상을 위한 한 조각" Apiece의 사회공헌 활동에 사용됩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