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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천 : 조커] 무례한 세상에 방아쇠를 당겨버린 광대

문화 & 예술 이야기/인생 영화 소개

by Aaron martion lucas 2019. 10. 1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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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라는 캐릭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언컨대 이번 영화 <조커>를 보기 전과 보고 난 후 몇 가지 생각의 변화가 들었을 것이다. 우선 조커를 연기한 대표적인 배우 "잭 니콜슨"의 조커 연기는 그 누구도 근접하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에게 최고의 조커는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 완성한 "히스 레저"의 조커였고, 앞으로 내 평생 그를 뛰어넘는 조커를 볼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내면에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접한 후 나는 "히스 레저"의 조커와 정 반대편에 서있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주연)이라는 조커가 있었음을 나는 깨달았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의 광기는 말 그대로 지난 두 배우의 광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잭 니콜슨"의 조커는 코믹스 만화책을 그대로 현실로 가져와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잭 니콜슨 조커
1989년 영화 <베트맨>에 등장한 "잭 니콜슨"의 조커

"히스 레져"의 조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혼돈의 화신을 표현하며 조커란 캐릭터를 최고의 악당이자 절대 지워지지 않는 강렬함을 남겼다.

히스 레저 조커
2008년 영화 <다크나이트>에 등장한 "히스 레저"의 조커

그러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앞서 말한 두 조커와 달리 정말 세상에 이토록 불운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비참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북함을 느낄 정도의 불편함이 담긴 광인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자기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광기의 끝에서 끌어내는 슬픔들은 역대 어떤 조커보다도 음울하고 처참한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제작사 <DC 유니버스>의 만화적인 색감을 도려낼 수 있었고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기존의 가벼운 히어로물 영화가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 

호아킨 피닉스 조커
2019년 영화 <조커>에 등장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영화의 작품성, 완성도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만큼 훌륭한 영화다. 연출부터 시작해 촬영, 음악, 미술 그리고 미친 연기력까지 부족한 면을 찾기가 힘들 만큼 완벽한 영화지만 정작 극장에 불이 켜지고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내내 가슴속에 왠지 모를 불편함과 유쾌하지 않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감독이 원했던 바였다면 너무나도 훌륭하게 관객들에게 영화의 의미를 선물했다. 이것은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이 아닌 극찬이다. 애초부터 감독은 병적으로 웃고 있는 조커가 가득한 영화를 제작했지만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웃지 않길 바랬다. 그리고 그 의도는 너무나도 성공적이었다. 최근 많은 언론매체에서 영화<조커>를 문제 삼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러한 비판은 한국 뉴스에서까지 떠들어대고 있는데 영화를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가 현재 지금 우리 주변에 놓인 사회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말 있는 그대로 들이박아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영화 하나의 영향으로 폭동을 걱정하거나 범죄를 우려하는 모습이 이미 우리 사회에 사회적 갈등이 퍼져 있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아서 플렉을 조커로 만들어버린 세상

사람들은 참 배려가 없다 그리고 예의가 없다. 지금보다 훨씬 더 예의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영화 속 주인공 "아서 플렉"(조커의 진짜 이름 : 호아킨 피닉스 연기)이 세상을 표현하는 말이다. 배려는 없고 무례하기만 한 세상, 이 영화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바로 주인공 아서가 어째서 세상을 이렇게 바라봐야 했을까 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영화<조커>는 한 광대의 미쳐버린 내면을 그려내고 있는 영화이며 동시에 그 광대를 둘러싼 미쳐버린 세상의 환경을 너무나 무덤덤하게 배치하고 있다. 아서는 사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웃음 때문에 주변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것은 아서가 가진 특이한 병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수시로 웃음이 터지고 이를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아서는 고통스러울 만큼 격한 웃음으로 말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때마다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작은 종이쪽지를 들고 다닌다. 하지만 아서가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자신의 주변은 그의 그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관객에게 말해준다. 이 장면에서 앞자리에 앉아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에게 아서는 광대표정을 지으며 웃겨주게 되는데, 정작 아이 옆에 엄마는 그런 아서를 이상한 취급 하며 굉장히 불쾌한 어투로 그를 경계한다. 이후 아서는 특유의 병적인 웃음이 터지게 되고 아이 엄마에게 자신의 상태를 쪽지로 알려준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는 버스에서 혼자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채 폭소를 터뜨리고 있는 이 남자의 발작적인 웃음은 보는 사람으로까지 분위기 전체를 굉장히 기묘하게 만들어 버린다. 

버스안 아서 플렉

이처럼 아서의 세상은 선의와 진심으로 주변을 대해도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결국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곳, 바로 그곳이 아서가 사는 세상이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모순들로 가득차 있다. 정신과치료 상담사는 아서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서로 일방통행만을 하고 정작 자신의 웃음을 찾지 못하는 아서는 남을 웃기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하는 등 온통 모순덩어리들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언가 목에 걸린 듯 우리가 불편한 이유는 알게 모르게 영화 속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투쟁의 상징 : 권총

영화 속 10대 청소년들에게 강도를 당한 아서는 동료로부터 한 자루의 권총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 이 권총은 하나의 작은 투쟁의 수단으로 영화는 그리고 있다. 아서에게 권총이 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언제나 나약한 존재의 광대였던 그가 이제 언제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발사된 총알이 방 안에서 굉음을 냈을 때, 그는 비로소 그가 무엇을 손에 쥐었는지 그 본질을 깨닫게 되어 버리고 만다.

지하철안 조커
지하철에서 광대를 만나면 건들지 말자

강도를 당했을 때 알게 된 폭력의 아픔, 세상으로부터 하루하루 버림받는 고통, 비루한 인생만으로도 벅찬 그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조차 조롱당하고 공격당하자 그는 결국 자신의 권총을 이용해 세 명의 남자를 침착하게 살해하게 된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던 그였지만 놀랍게도 살해하는 동안 한 번도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냉정하고 엄숙한 심판자와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아무런 죄책감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섬뜩한 모습을 보이는데, 오히려 세상은 세 명의 죽음에 큰 관심을 보이며 그가 증권사에서 일하는 애널리스트 같은 부르주아 계급을 처단한 것에 대해 불평등한 세상을 향한 저항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그 순간 여태껏 남들에게 관심 한번 받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행동이 세상을 조금 변하게 만들었다고 느낀다. 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자신이 그토록 받고 싶었던 관심이 그로써는 살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영화는 광대 살인을 지지하는 것은 가지지 못한 자,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기득권자로 분명하게 선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놀라운 인물 "토마스 웨인"이 등장하게 된다.

베트맨과의 악연의 시작

조커와 어린 베트맨의 첫 만남
훗날 베트맨이 될 소년과 처음 조우한 조커

우리에게 그동안 익숙한 히어로 베트맨(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베트맨 영화에서 이어져온 베트맨과 조커의 악연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먼저 토마스 웨인은 고담시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세상을 구분하는 선에 따라 토마스 웨인은 당연히 정의를 외치며 아서 플렉을 이렇게 악으로 규정짓는다.

가면을 쓴 건 용기가 없어서이고, 그런 비열한 자들은 한낱 광대에 불가하다.

이 말은 영화 <베트맨>에서 조커가 베트맨에게 가면 속에 숨은 너와 나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논리와 맞닿아 있다. 또한 기득권층에게 세상의 악이라고 규정지어진 아서의 생각은 토마스와는 조금 다르다. 자신이 죽인 3명의 피해자들이 모두 기득권 층이기 때문에 세상은 열광하는 것이며 그들보다 셀 수 없이 많은 가지지 못 한자들의 비참한 죽음은 단 한 번도 조명받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살인이 다른 살인과 비교했을 때 어째서 나쁜 것인가? 되묻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미 기득권층과 가지지 못한 자를 대표하는 광대의 갈등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 속 토마스 웨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아서 플렉이란 인물을 완벽하게 조커로 탄생시키는 기폭제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아서와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 "페니 플렉"은 유일하게 아서를 사랑해주는 인물이자 아서의 광기를 멈춰주는 브레이크와 같은 역활을 하고 있다. 그녀는 사실 과거 토마스 웨인의 저택에서 일한 하녀이자 토마스와 사랑을 나눴다고 굳게 믿는 인물로서 매일 같이 토마스에게 아서와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설명하며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같이 답이 없는 편지를 보내는 어머니가 답답했던 아서는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게 된다. 그 내용엔 자신이 토마스의 아들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아서는 자신의 불우한 인생 속 한줄기 희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누가 됐든 아버지가 필요했고 자신의 뿌리와 존재의 이유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영화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아서에게 동경에 대상이었던 "머레이 쇼"를 상상하던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서에게 머레이는 흡사 아버지였고 그간 힘들었던 자신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주는 머레이를 상상하며 위안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로 생각했던 토마스 웨인과 마주한 아서 플렉은 그가 상상했던 모습과 달랐다. 토마스는 당당한 사내로, 아서는 그런 그 앞에서 비참하게 애걸하는 사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서플렉과 토마스웨인
토마스 웨인은 애걸하는 아서 플렉을 정신병자라며 면상을 후려버린다.

아서는 그런 인물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망상증 환자, 이런 그의 특징은 아버지라고 굳게 믿었던 토마스가 사실 어머니의 허상이 만들어낸 망상이었다라는 진실과 자신이 입양되어 학대받고 자랐다는 사실을 마주한 순간 자기 스스로도 봉인했던 진실과 선택적으로 정보를 수용함으로써 간신히 버티고 있던 아서의 자아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은 비극인 줄 알았는데, 사실 코미디였어.

그는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대중이 원하는 상징 "조커"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그 변신의 완성은 그동안 자신이 거짓으로 믿고 허구로 만들어 냈던 애인과 자신에게 하나 남은 뿌리마저 잃고 싶지 않아 학대받은 기억을 스스로 봉인하면서까지 지켜냈던 어머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이 죽음보다 의미 있기를 바라며 머레이를 쏴 죽인 순간 비로소 완벽한 "조커"가 된 것이다. 조커라는 인물로 아서 플렉이 완전히 변한 이후 더 이상 그는 잘 웃지 않게 된다. 오히려 자신의 피로 입술을 칠하는가 한편 그의 몸짓, 눈빛 하나하나가 완전히 변해 그가 우스꽝스럽게 추는 춤까지도 어딘가 모르게 섬뜩하면서도 처절한 느낌을 지니게 된다. 이제 아서 플렉은 사라지고 조커가 이 영화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조커가 죽여버린 사람들

이 영화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민감할 수 있는 사회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다시 말해 곯을 때로 곯아버린 미국을 고담 시라는 공간에 투영시켜 말하고 있는 것으로 계속되는 파업과 뚜렷한 대책이 없는 행정력의 부재뿐 아니라 계급 간의 차별 문제, 우리 주변 소외된 이웃의 문제, 극빈층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복지문제와 미국 대선과 총선에 가장 큰 화두가 되는 총기문제들까지 너무 무모할정도로 당당하게 러닝 타임 속에서 모두 담아 내고 있는 것이다. 조커의 살인은 잔인하거나 추악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무례한 사회 안에서 무례한 자들을 심판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즉, 이 세상에 보다 많은 배려와 보다 나은 예의를 갖추게 하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것이다.

아서 플렉은 무례한 세상에 언제나 고통받는 약자이자 광대였다.

그에게 살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사회문제를 대표하고 있다. 첫 살인에서 그는 증권가의 애널리스트 세명을 죽인다. 그들은 서민들의 돈을 달콤한 말로 현혹시켜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모습으로 계급간의 갈등을 설명하고 있으며 자신의 우상이었던 머레이를 죽일 때 그는 미디어 사회에서 방송국이 가진 탐욕스러운 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실제로 방송국은 이슈를 만들어내기에 급급하다. 사람이 죽은 사건조차 그들은 하나의 가십거리로 왜 좀 더 잔인하고 자극적으로 죽지 못했는지 아쉬워하는 집단이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잘 포장된 모습으로 마치 거짓을 진실인 마냥 왜곡시키는 집단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권력과 끊임없는 유착 관계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그가 당기는 방아쇠를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이 사회를 향한 총성처럼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생방송으로 TV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광대가 죽이자 시민들은 이 행위에 환호하며 거리로 쏟아진다. 그렇게 아서 플렉은, 아니 조커는 그렇게 고담시의 영웅이 되었다. 

영화가 던진 우리의 숙제

자 이렇게 영화<조커>의 리뷰가 끝났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고 깨름찍한 기분을 느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혹은 영화를 보기 전 이 글을 읽었다면 나의 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보라. 조커가 환호받는 세상에선 분명 병적인 행위를 추앙하고 환호하고 있다. 조커는 사람을 죽이고 폭동을 선동하는데도 영화 전반부에서 차근차근 설명한 조커의 내면이 서술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기변명처럼 보일 법한 일련의 변명들이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에 몸짓이 깃들어 어떤 몸짓으로 변모할 때 그 파괴적인 에너지에 매료되고 광기 상태의 조커에게  동정심을 보내고 있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영화는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커가 집착하는 분노의 기원은 무엇인가?

영화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조커는 사실 자신에게 닥친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권총을 사용했다. 그것이 우연치 않게 투쟁의 상징이 되었고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 속에서 조커 개인의 망상 그리고 고담시의 사회적 움직임을 교묘하게 연결해 또 다른 망상의 영역으로 관객을 데려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커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의 행동은 사회적 움직임을 촉발시킨 혁명가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나고 있지만 실상 그는 대중에게 호명된 상징물에 불가한 것이다.  

이 영화는 강렬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이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던질 때 그 중심인물을 자기애적 망상장애를 가진 인물로 설정하고 그가 사회의 무관심에 좌절하다가 자신의 파괴적인 충동을 앞세워 분출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를 환호하는 관객과 비난하는 관객 모두에게 의도된 혼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커의 행위가 그럴법하고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스스로의 도덕심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조커라는 영화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조커가 쏴 죽인 언론매체가 현실에서 영화를 비난하고 우려의 목소리를 보일 때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바뀌지 않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은 어떤 경우에서도 쉽게 답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의 이유다.

이번 조커는 예전의 조커와 다르게 자신을 지지하고 소동을 벌이는 지지자들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 차이점을 보인다. 지난 "히스 레저"의 조커는 언제나 미쳐있지만 자신의 행동의 타당성을 섬뜩한 말들로 설명하며 자신의 행동과 이념 그리고 비전을 소름 끼치게 풀어냈다. 따라서 범죄자들의 사상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했다면,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행동의 목적은 무엇인지 이유는 또 무엇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환호하는 이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혼란이 가득한 그곳의 중심에 조커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이 영화의 감독은 관객들에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우리가 답을 하는 과정에서 이 영화는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영화 <조커> 감독 토드 필립스

이제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이 찾은 답이 무엇인지...

 

영화 조커 포스터

 

<루카스 매거진 : 자유로운 작가들이 만드는 독립 잡지>
에디터 : Aaron
작가들이 입에 달고 사는 커피 한잔 선물하기 링크 : https://toon.at/donate/lucas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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