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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천 : 지금 만나러 갑니다] 죽은 사랑에 대한 예우

문화 & 예술 이야기/인생 영화 소개

by Aaron martion lucas 2019. 12. 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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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뒤 남겨진 인물의 고통을 지독하게 표현하는 작품이 더러 있다. 떠난 빈자리를 끌어안으며 피폐하게 전락한 삶을 뒷전에 두고, 그리움으로 모든 시간을 아득히 채우는 인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작품들은 늘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래서 이 아픔을 타파해 다시 일어서는 주인공의 모습에서는 뭔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류의 작품이 대체로 남겨져 피폐해진 사람을 살리는 수단으로, 새로운 사랑을 이용하다는 것에 늘 아쉬움이 있었다. 남겨진 사람을 다시 살기 위한 동력으로써 새로운 사랑을 끼워 맞추는 모습은 못내 씁쓸했다. 남겨진 인물이 너무 무능력해 보였고, 사랑이 빠진 자리를 사랑으로 채워야만 살아나는 인물의 수동적인 모습은 보낸 사랑에 대한 예우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이 빠진 자리를 사랑으로 채운 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일 것이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인 누군가에게도 확실한 위로와 일어설 수 있는 계기로 사랑만큼 좋은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남겨진 사람의 시선에서 일 뿐.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죽은 사랑은 더 이상 없는 거나 다름없겠지만, 살아생전 그들이 함께한 시간에 촘촘히 박혀있던 추억들이 버젓이 숨 쉬고 있지 않은가. 뜬 눈으로 남겨진 사람의 주위를 맴도는 두 사람의 추억은 한 사람이 죽었다고 곧장 사라지지 않는다. 추억 또한 그의 곁으로 성불시켜주어야 하는 것. 사랑이 빠진 자리에 새로운 사랑을 채우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죽은 사랑을 그려내는 여타 로맨스 영화들은 이 추억을 타이르지 않는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제외하고는...

2004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리메크 하여 2018년에 개봉한 소지섭, 손예진 주연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원작과 같은 이야기 흐름을 따른다. 그래서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두 영화 모두 공통적으로 해당되니, 여기서는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버전으로 이야기하겠다.

남자 주인공 우진(소지섭)은 고교 시절부터 운동을 하던 소년이었다. 학창 시절 운동을 특기로 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그렇듯 우진도 학업보다는 운동에 전념하는 친구였고, 수업 시간에는 잘 끼지 못하거나 혹은 있어도 졸기 바빴다. 반면, 우진과 같은 반인 수아(손예진)는 흰 피부와 큰 눈, 긴 생머리를 자랑하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녀로 말 수는 적었지만 학업에 충실했고, 우진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수아의 모습에 빠지기 시작했다. 소극적인 성격 탓에 수아에게 말 한번 쉽게 걸지 못했지만. 더군다나 수아의 성격은 쌀쌀맞기 그지없었기에 우진이 다가가기란 더욱 쉽지 않았다.

그 사이 시간은 아쉬움으로 덕지덕지 칠해지며 빠쁘게 지나갔다.

결국, 우진은 그런 시간을 뒤로하고 졸업이란 이름 앞에 수아와 헤어지고 만다. 하지만 인연이긴 인연이었는지 혹은 끝까지 수아를 잊지 않고 기억한 순박한 사랑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끝끝내 우진은 성인이 되어 수아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수아 또한 학창 시절부터 우진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건 그 이후에 밝혀졌다. 그렇다, 처음부터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둘의 사랑은 더욱 견고해지고 결혼이란 이름으로 완성되어 그 결실로 아들 지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물론 행복의 댓가는 수아의 죽음이었지만...

평소 몸이 좋지 않던 수아는 아들을 낳은 뒤로 더욱 몸이 약해지면서 얼마 못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직 기적과 마법의 실제를 믿는 아들과 순진무구한 우진을 두고 하나의 약속만 남긴 채로.

비가 오는 날 돌아올게.

수아가 죽기 전 남긴 그 말은 아들 지호에게는 당장의 슬픔을 달래는 것과 동시에, 다가올 크리스마스나 생일을 기다리는 기대감처럼 비 오는 날에는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밝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럼 우진은 어땠을까? 그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수아가 남긴 생생한 흔적이 아들이었으니. 아이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비와 함께 수아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내심 우진 본인도 작은 기적을 바라면서.

그렇게 수아가 죽은 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여름, 장마가 찾아왔다. 수아가 돌아오기로 약속한 날. 우진은 아들의 손을 잡고 우산을 쓴 채 수아와 함께 가던 오래된 기찻길 위의 터널로 향했다. 아들은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우진은 혹시나 하는 기대로. 확신과 불신이라는 양날의 검이 '혹시'라는 기대에 함께 기대 있었다.

그렇게 잠시 후, 두 사람은 터널에 도착했다.

그리고 정말로 죽기 전 모습의 수아가 눈을 감은 채 터널 안 벽에 기대 있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생전 함께 사랑했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였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우진과 지호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돌아왔으니까.

영화는 수아가 돌아온 경위에 대한 설명은 일절 하지 않았다. 마법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전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깊었던 탓에 이를 위로하기 위한 작은 선물로 누군가가 실현시켜준 작은 기적이라 말하며, 장마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그녀를 되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시련 아닌 시련을 함께 쥐어 주며. 그것은 바로 사랑했던 기억의 부재였다.

과연 그들은 기적적으로 얻어낸 찰나의 시간 동안 다시 사랑을 기억할 수 있을까?

정답은 수아가 다시 우진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전의 사랑까지 기억해내는 또 한 번의 기적이었다. 처음 그녀의 눈에 나이 든 우진과 사내아이는 그저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기억에도 없는 남편과 자식이라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이었는지, 수아는 잃어버린 기억의 자리에 같은 사랑을 채워 넣기 시작하더니 점차 지금의 우진을 또 한 번 사랑하게 됐고, 우리의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잃어버릴 수는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그 사이 속절없이 장마는 끝나가고 있었다.

결국, 모든 사랑과 자신이 죽기 전 한 약속을 위해 돌아온 것 까지 기억한 수아는 끝나가는 장마와 함께 진짜 이별을 두 사람에게 고한다.

우진 씨 당신과 함께한 모든 시간을 사랑해. 미안해하지 마.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행복한 삶이었고,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았어. 그리고 내 아들 지호야 엄마와 아빠는 널 위해 만난 거야. 널 세상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너 때문에 엄마가 죽어다는 그런 말은 듣지 마렴. 엄마는 100년을 산다 해도 네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아. 사랑해 내 아들.

수아의 눈물과 진짜 이별이 세 사람의 주위를 에워싸며 진정한 헤어짐이 찾아왔다. 모든 기억과 추억을 수아 또한 온전히 갖고 떠날 수 있었고, 남겨진 우진과 지호에게는 진짜 이별에 대한 수긍과 다시 삶을 살아갈 또 다른 의미의 희망과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눈물과 안도로 장마의 종말과 함께 수아를 배웅했다.

죽음은 아무리 대비를 하고 준비를 해도 급작스럽고, 죽음으로 끝난 이야기와 감정은 지혈되지 않는 상처로 끝도 없이 피를 토해낸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 고통이기에 대체로 다른 사람을 상처 위에 이식받아 피를 멈추고 생기를 돌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진과 지호, 수아의 사랑은 잠깐의 마법을 통해 죽음을 물러 다시 한번 기억을 곱씹도록 도와주며 진정한 의미의 이별을 준비시켜준다. 사랑을 떠나보낼 그 날에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게 했다.

이별할 수 있도록 주어진 기회에, 사랑했던 모든 흔적들에 대해 남겨진 사람은 전심을 다해 예우를 갖출 수 있었고, 떠나는 이는 충분한 안심과 감사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이처럼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뒤 남겨진 인물이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떠난 사랑과 함께 한 사랑으로 다시 희망을 얻으며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존 다른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죽은 사랑에 대한 예우이며, 남겨진 이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영화를 본 뒤, 여타 다른 영화에서 느껴지던 아쉬움과 씁쓸한 자리에 공허한 따뜻함만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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